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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Jul 31. 2024

작은 오빠가 가출했다.

큰오빠, 작은 오빠 1

올케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작은오빠가 뭔가 이상하다고 한다. 큰오빠랑 올케언니는 작은오빠가 살게끔 임대 아파트에 살도록 도와줬다. 항상 작은오빠를 곁에 두고 세상을 살아가도록 신경 써줬다.


작은오빠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적대시했다. 큰오빠가 집도 살게 해 주고 어떡해서든 먹고살라고 도배 기술도 가르쳐 주고 신경 써줬는데 고마움을 몰랐다. 항상 올케언니와 큰오빠의 흉을 봤다.


올케언니와 큰오빠가 살가운 성격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작은오빠한테 잘해주는 건데도 그렇게 적대시하고 말을 안 들었다. 그나마 내 말은 잘 들어서 올케언니가 내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작은오빠의 임대 아파트에 가보았다. 방도 두 개에다 구조도 좋고 혼자 살기 과분했다, 옛날 우리가 살던 집과 비교하면 너무 좋은 곳이었다. 작은오빠는 이렇게 좋은 집도 방치했다. 엉망이었다. 방에는 오빠가 끄적이던 노트가 보였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황당무계한 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올케언니는 그간의 작은오빠의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일도 안 하고, 이상한 소리만 해대고, 임대 아파트를 계약을 해지하라는 둥... 정말 황당무계했다. 살 곳을 없애면 어디로 가려는 건지... 큰오빠 부부의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 같았다.


 얼마 후 작은오빠가 임대 아파트를 빼라고 하도 성화를 부리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결국에는 빼줬단다. 그리고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렇게 몇 달 동안 보이지 않더니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작은오빠가 와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노숙을 했는지 거의 거지꼴에 이마엔 큰 상처가 있었다. 어떻게 다친 거냐고 물어보니 횡설수설이다. 어딘가 정상 정신 상태는 아닌 거 같았다.


아버지는 작은오빠를 받아들이기 싫은 눈치였다. 새엄마도 같이 사는 방 두 개짜리 집이니, 잘 때도 마땅치 않았다. 다른 공간이 없으니 오빠는 주방 바닥에서 잤다. 안쓰럽지만 내 방으로 들어와서 자라고 할 수 없었다. 또 아버지 부부의 방에서 잘 수도 없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삼시 세끼 집에서 있으니 아버지가 엄청 구박을 했다. 심할 정도로 구박했다. 새엄마도 불편한 눈치가 보였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나는 아침에 회사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니 집에 자주 없으니 상황을 자주 못 봐도, 집에서 작은오빠가 아버지한테 얼마나 사람 취급을 못 받을까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음속으로 '아버지는 그래도 자식이 저런 모양인데 감싸주지도 못할까.'

'정신이 아픈 자식을 조금이라도 수용해 주면 안 되나'

'어려서 아버지한테 하도 맞아서 저렇게 된 건데 지금이라도 좀 잘해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침에 출근하기 전 지갑 속의 돈을 모두 꺼내 오빠에게 주었다. 4만 원이었다. 이렇게라도 부모에게 상처받은 오빠의 마음이 나아지길 바랐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와보니 작은오빠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아니 갈 데도 없는 오빠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신이 아픈 자식이 나갔는데도 태연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보나 마나 아버지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나갔을 거다.


" 그놈의 새끼. 살등가 말등가 상관없어. 나가 뒤지라 그래."


아버지 때문에 저렇게 된 자식을 저렇게 외면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또 어디서 어떻게 아무것도 없이 나가서 어떻게 살아가려는지 작은오빠가 너무 걱정이 되었다. 나를 못살게 굴었던 오빠이지만 그놈의 피붙이가 뭔지 참 불쌍하고 안 됐다.


오빠는 그렇게 나가서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찾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길동 시장을 구경을 했다.


길동 시장은 참 흥미롭다. 일단 시장에 가면 뭐가 됐든 밥상을 차릴 거리들이 있다. 할머니 떡볶이는 500원에 저렴하고 푸짐하고 맛있어서 인기가 많다. 딱 6시에 영업이 끝나는데 참새 방앗간 들리듯 꼭 들렸다.


그날도 그랬다. 큰 아이를  태운 유모차에 장본 봉지들을 주렁주렁 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 중간쯤 다다랐을 때다. 나는  유모차를 멈춰 세우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흐렸다. 이곳은 내가 자주 가고 익숙한 길이다.


뜬금없이 왈칵 눈물이 나왔다.


오빠가 신내동 우리 집을 나간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그동안 나는 결혼을 했고 첫아이를 낳았다.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까지 연락을 안 할 리가 없다. 분명히 어딘가에서 무연고로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고 죽었을 게 분명했다.


이 하늘 아래 오빠가 없고 죽었다고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나왔다. 동생이 결혼한 줄도 모르고 조카가 생긴 줄도 모르고 그렇게 소식이 먹통으로 죽었다고 생각하니 그 인생도 가여워서 눈물이 나왔다. 평범한 일상 속에 오빠 생각이 갑자기 난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 '죽지 않고 살아 있게 해 주세요.'


얼마 후 큰오빠가 다급하게 전화가 왔다. 작은오빠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작은오빠가 살아있다고.?'


죽은 줄 알았던 작은오빠가 살아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게 감사했다. 그렇게 기도했는데...


작은오빠는 시립정신병원에 있었던 거였다. 오빠는 처음에 가족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주 나중에 이제 퇴원할 때가 되니 관계자에게 큰오빠의 전화번호를 알려준 것이다.


아버지와 큰오빠 가족. 우리 가족 모두 시립정신병원으로 향했다.


'정말 오빠가 살아 있을까? 오빠가 맞을까? '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기 어려웠다.


우리는 대기실에서 오빠를 기다렸다. 잠시 후 어느 분 손에 이끌려 오빠가 들어왔다. 오빠가 맞았다. 오빠였다. 다행히 건강해 보이고 의사소통도 잘 됐다. 머리도 깔끔하게 깎여있었다. 우리는 모두 작은오빠를 보고 울었다.  아버지도 울었다. 나도 울었다. 우리 모두 죽은 줄 알았던 오빠를 만난 것이다.


작은오빠는 우리 집을 나간 후  거리를 헤매다 노숙자 쉼터에 갔다가 결국 이곳으로 보내져서 거의 3년을 있었던 거다. 이곳에서 정신과 약도 먹고 심리 상담도 받은 모양이었다. 미치지 않고, 죽지 않고, 살아있는 오빠가 다행히었다.


오빠는 내가 낳은 딸을 바라보았다.


"오빠 조카야. 나 결혼했어. 여자애야."


아기가 낯설을 오빠를 위해 설명을 해주었다.


"네가 아기를 낳았어?"


오빠의 눈에도 눈물이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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