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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Aug 01. 2024

사람 구실하던 작은 오빠가 아프다.

큰오빠, 작은 오빠 2

드디어 작은오빠를 만났다.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3년이 넘도록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던 오빠는 그렇게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우리 가족들 중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던 오빠가 살아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가족들과 바로 연락할 수 있었는데 오빠는 오랫동안 가족을 멀리 한 것이다. 그 마음을 세세하게 알지 못해도 참 고생을 많이 했겠구나 싶었다. 밥이나 제대로 먹고 다녔는지 걱정했는데 병원이란 곳에 있었으니 치료도 받고 삼시 세끼 먹었다니 다행이었다.


이제 이곳에서 퇴원해야 하니 가족들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3년 동안 병원에 있으며 오빠도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작은 오빠는 곧장 퇴원했다.


이제 작은오빠의 사회 적응이 필요하다.  큰오빠와 올케언니는 작은오빠를 데리고 다니면서 도배 기술을  하나하나 가르쳤다.  오토바이도 하나 사줘서 도배 물품도 싣고 다니게 처음 시작을 아주 잘 도와주었다.


큰오빠는 아버지도 하지 못했던 일을 동생을 위해서 해냈다. 부모는 포기했는데 큰오빠, 올케언니가 포기하지 않아서 작은 오빠가 살게끔 해준 것이다.


작은오빠도 이제 벌이가 시작됐다. 주로 천호동에서 일하게 되니 천호시장 근처에 하숙집에 살게 해 줬다. 한 달에 40만 원 정도 내면 숙식과 밥이 다 해결되는 하숙집이었다. 올케언니가 신경을 많이 써줬다.


작은오빠는 도배 기술이 나날이 늘었다. 나중에는 큰오빠보다 훨씬 깔끔하게 잘했다. 원래 머리도 있고 꼼꼼한 성격이라 도배 한 결과물이 훨씬 좋았다.


나는 작은오빠에게 틈만 나면 "도배가 오빠한테 잘 맞는 직업이다. 큰오빠보다 오빠가 훨씬 잘한다."칭찬을 해줬다.


작은오빠는 오토바이에서 다마스로, 다마스에서 봉고차로 업그레이드됐다. 운전도 아주 잘했다.  집도 하숙집에서 월세로. 월세에서 자가로  옮겼다. 자신이 처음으로 제대로 살림을 해 나갔다.  처음으로 인간답게(?) 살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는 큰오빠한테서 독립해서 자기만의 거래처를 늘려나갔다. 원래 천성이 게으른 사람이어서 이십 대에는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하지 못했는데 도배는 적성에 맞았는지 나날이 기술이 좋아졌다.  그러니 거래처가 늘고 안정적으로 살림을 꾸려갔다.  


돈도 잘 모아서 금방 금방 돈이 모였다.  어느 날은 '너는 왜 그렇게 돈을  못 모으냐. 나는 잘 안 쓰니까 금방 모인다.' 히죽히죽 웃으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천호동에서 큰오빠, 작은오빠, 나. 이렇게 모여 살면서 아주 친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지냈다. 우리 집 애들 방이 곰팡이가 펴서 도배를 부탁한 적이 있는데 오빠는 참 섬세하고 꼼꼼하게 일을 잘했다.


작은오빠는 삼십 대 중반부터 처음으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살아나갔다. 어릴 때 나에게 못되게 군 사람이지만, 집안의 아픈 손가락 작은오빠가 드디어 사람답게 살기 시작하니 참 좋았다.


같은 동네에 사니 우리 집에 자주 왔다. 항상 우리 집에 오는 것을 좋아해서 불시에 잘 찾아왔다. 나는 그러면 집에 있는 반찬을 총동원해서 밥을 차려낸다. 엄마 없이 자란 것은 오빠도 똑같으니 마음에 안쓰러움이 있는 오빠였다. 늘 연락도 안 하고 자기가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갔다.  아마 우리 집에서 가정의 단란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서울에서 양주로 이사 와서도 우리 집 도배도 해주고 한 시간 거리 운전해서 집도 자주 놀러 왔다. 늘 연락도 안 하고 왔다. 나는 그러면 또 불쌍한 작은 오빠를 위해 좋아하는 겹살도 굽고 밥을 차린다.

그러면 또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다가 집에 다.


그렇게 계속 계속 큰오빠 옆에서 큰오빠랑 올케언니 말 잘 듣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작은오빠는 큰오빠랑 올케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를 생각해 보면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였던 거 같다. 걱정되는 마음에 이 소리 저 소리 하면 그렇게 듣기 싫어했다. 지금 글을 쓰면서 알았는데 얼굴만 마주치면 걱정 잔소리만 하니 작은오빠도 질리긴 했겠다.


나는 잔소리를 안 하고 수용적이니 내 말은 들었다. 올케언니가 그렇게 씻고 다녀라 해도 안 씻어서 냄새 폴폴 나게 사람 힘들게 했는데, 우리 집 와서 오빠 씻어라 하면 바로 씻었다. 우리 집에서는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밥도 오빠 좋아하는 것으로 주고 잔소리는 거의 안 했으니 나를 동생이지만 의지를 많이 했다.


그렇게 계속 살았으면 작은오빠는 지금 양주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서 밥 먹고 저녁까지 먹고 우리 애들 용돈도 주고 그랬을 텐데...


그렇게 계속 계속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계속 계속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한참을 놀러 오지 않던 작은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병원이야."


작은오빠가 병원에서 수술했다고 연락이 왔다. 가보니 목 디스크 수술을 한 거였다. 통증이 너무 심해 살려고 수술한 거였다. 병원에 누워있는 오빠를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이제야 제대로 살고 있는데...  그래도 오빠가 회복될 줄 알았다.


얼마 후 이번에는 디스크 수술을 했다. 오빠는 어려서 높은 곳에서 떨어진 적이 있는데 그때 방치하고 놔둬서 허리가 안 좋았던 것이다. 그렇게 두 번의 수술을 했으면 좋아졌어야 되는데...


이번에는 올케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작은오빠가 술 먹고 넘어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술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을 안 듣더니... 그동안 술을 너무 자주 먹어서 속을 엄청 썩이더니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작은오빠는 자기가 살던 집도 큰오빠 말 안 듣고 홀랑 팔아서 없애고 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살던 신내동 임대 아파트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 그래도 돈은 잘 벌어서 냉장고 세탁기, TV 새것으로 사서 놓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달이 난 것이다. 큰오빠는 천호동, 작은오빠는 신내동, 나는 양주에 살고 있었다. 같은 동네에 살 때보다 작은오빠를 덜 신경 써서 그런가 자기 하고 싶은 데로 막살기 시작한 것이다. 내 생각에 작은오빠도 우울증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어찌 정신이 온전할까.


디스크 수술한 몸을 조심하지 않고 만취해서 넘어진 것이다. 이미 두 번의 수술로 디스크가 좋지 않았는데 만취해서 넘어진 것이 결정적으로 나빠진 계기가 됐다. 그 후로 작은오빠는 그대로 일을 하지 못하게 됐다. 아버지처럼 점점 나빠지고 있다. 삶의 의지가 없으니 재활 의지도 없고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


내가 네 아이를 키우며 우리 가정을 돌보는 동안, 오빠는 그렇게 무분별하게 살고 있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이번에도 큰오빠와 올케언니는 그 모든 뒤치다꺼리를 하고 병원에 정말 자주 가서 보고 오고는 했다. 나는 못했다. 우리 집도 총체적 난국이니 작은오빠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작은오빠는 아기가 되었다. 말도 잘하지 못한다. 대소변도 못 가리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요양원에서 있은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그동안 큰오빠 올케언니가 애 많이 쓰고 일 처리를 다했다. 큰오빠가 나는 하나도 신경 쓰지 않게 다 했다. 궁금해서 물어보면 너는 몰라도 된다고  한다.


남양주 어느 골짜기 요양병원에 오래 있다가, 코로나 전에 양주 요양원으로 왔다. 전보다 가까워졌는데 코로나 때는 아예 못 갔고 지금은 갈 수 있는데 자주 안 간다. 갔다 오면 마음이 좋지 않다.


작은오빠는 기다리는데 자주 안 간다. 그냥 갔다 오고 나면 너무 힘들다.  과자를 사 오라고 했는데.. 뭐 먹고 싶냐고 하니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과자"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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