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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Aug 05. 2024

아버지 죽어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을거라는 다짐

신내동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고등학교 때 신내동으로 이사 와서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다. 지금까지도 나의 꿈에 아버지와 신내동에 사는 장면이 제일 많이 단골로 나온다. 아버지와 살았던 동네가 많은데도 신내동의 기억이 선명하고, 꿈에서는 꼭 현실 같다.


신내동은 배밭이었고 낙후된 동네였다. 우리가 가진 돈으로 밀려 밀려 서울의 시골동네까지 오게 된 것이다. 집 앞은 온통 밭이 있고, 화장실이 우리 집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것마저도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불편한 집이었다. 부엌문을 열고 잠이 들면 청개구리가 내 다리에 올라와서  화들짝 놀라서 깬 적이 있다.


판잣집 옆집은 나보다 두 살 많은 Y 언니네 식구가 살았다. 이 언니랑은 정말 말이 잘 통하고 죽이 잘 맞았다. 두 살 어린 남동생 J도 있었는데 우리는 셋이 죽이 척척 맞아서 잘 놀았다.


시한폭탄 같은 아버지를 피해서 Y 언니네 집에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잠도 자곤 했다. 바로 옆집이니 아버지가 유일하게 외박을 허락한 집이다. 우리는 밤새워 얘기도 나누고 서로의 아픔을 공유했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짤순이(세탁물을 탈수하는 기계)가 있었지만 빨래는 손으로 일일이 해야 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살림을 제일 싫어한다. 아버지 작업복 등 쌓인 빨래를 큰 고무대야에 그냥 아무 대책 없이 물에 담가만 놓고, 진짜 그냥 푹 담가만 놓고 놀러 나가기 일쑤였다. 일하고 돌아온 아버지의 불호령이 걱정되지만 정말 한창 놀러 다니는 게 재밌었다. 놀고 와서 후한이 두렵지만 슬슬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 살림 좀 덜어주지 나는 여자인데도 살림을 너무너무 싫어해서 아버지 도와줄 생각을 안 했고 관심도 없었다. 반찬도 아버지가 많이 만들고 특히 김장은 아버지가 집 앞 밭에서 직접 배추를 키워서 담그셨다. 오래 먹으려고 짜디짜게 김치를 만들었다. 밭에서 비름나물도 아버지가 직접 뜯어 오셔서 고추장에 무쳐주면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아버지는 총각김치도 맛있게 담그셔서 내가 참 좋아했다. 나중에 내가 결혼하고 자장면집 할 때 그 무거운 총각김치를 신내동에서 양주까지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가지고 오셔서는 가게 냉장고에 아무 말 없이 턱 놔두고 가셨었다. 몇 번 만들어 오셨다.


나는 지금도 총각김치를 보면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아버지가 해준 음식이 많았다. 돼지고기 넣고 끓인 된장찌개, 아버지가 만든 시원하게 적당히 익은 동치미는 소화 안될 때 먹으면 배가 쑥 내려간다.


버지는 매일 새벽 5시에, 개조 한 오토바이를 타고 구멍가게에 꽈배기 꼬마김밥 등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납품하는 일을 했고 항상 오후 3~4시쯤에 퇴근했다. 아버지는 녹음기의 불경을 틀어놓고 소주를 드시고 잠이 드시곤 했다. 아버지는 집안 물건도 손수 잘 고치고 남들이 버린 물건들도 고쳐와서 잘 사용했다. 나도 결혼하고서 아버지처럼 멀쩡한 물건들을 잘 주워왔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버지는 우울증이 있으셨던 것 같다. 매일 소화가 안된다고 용각산을 한 숟갈씩 드셨고, 매일 소주 한 병을 드시고 장미 담배를 한 갑씩 피우셨다. 항상 불행해했고 매일매일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아버지를 스무 살이 지나서 어느 날 마음으로 용서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같았는데, 내 몸이 성장할수록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의 삶이 불쌍했다. 밖에서는 법 없이도 살 좋은 사람이었지만 집에서는 폭군이었던 아버지. 용서해야지 하고 노력해서 된 게 아니고 어느 날 문득 용서가 됐다. 순간순간 아버지가 주었던  실오라기 같은 사랑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지 못해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몰랐던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집을 나왔고 아버지와는 한동안 연락을 끊었었다. 오빠 집에 살기도 하고 자취하는  친구 집에 얹혀살기도 하고 혼자 자취하기도 했다. 혼자 자취할 때는 폼생폼사 강남에 살아보겠다고 월세를 얻었었다. 강남 역삼동에 마당 있는 단독 주택 어두컴컴한 지하방이었다. 방에 있는 쪼끄만 창문을 열면 남의 집 담벼락이 보이고 매트리스에 옷걸이 하나, TV 하나 놓고 살았다. 부엌이라고 해봐야 방 밖으로 싱크대 하나 있고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했다. 열악했다.


그래도 아버지에게서 해방되고 너무 좋았다. 자유로웠다. 나는 퇴근 후에 강남사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나는 코딱지만 한 자취방에서 밤에는 카세트로 김건모 노래를 즐겨 듣곤 했다.


나는 자취로 몇 년 살다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다. 월급 타고 생활하고 도저히 생계가 어려웠다.  


마침 아버지가 신내동 방 두 개 임대 아파트로 들어가게 되었다. 신내동 시골동네 세입자들에게 임대아파트가 나왔다. 처음으로 집다운 집에서 살게 된 것이다. 이사 들어가는 날, 처음으로 내 방이 생기게 되어 너무 좋았다. 화장실도 집안에 있고 새 아파트 앞에 놀이터가 있고, 수목이 무성하여 상쾌했다. 베란다에서는 바로 앞에 산이 보였다. 사계절 풍경이 그리 아름다울 수 없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앞뒤 문을 열면 시원하다. 평생 살아보지 못했던 환경이었다. 결혼해서 나가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여기서는 좀 덜 불행했었던 것 같다. 주거가 안정되고 깨끗해지니 불화도 많이 감소했었다.


다행히 아버지도 내가 성인이 되니 예전처럼 심하게 때리는 일은 없었다.


나는 남편을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첫애를 낳았을 때 아기를 보러 우리 집에 아버지가 오셨다. 아버지는 내 아기를 보지 않고 나를 한참을 보았다.


 '왜 나를 보지' 이상했다.


아버지의 눈빛을 읽었다.


아기를 낳느라 고생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아주아주 무뚝뚝한 목소리로, 


"너는 괜찮냐"라고 물어봤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기를 안 보고 나를 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아기를 볼 때 아버지는 나를 본 것이다. 나만...




나는 아버지를 오랫동안 미워했었다. 우리  가족 모두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사람이니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이해해 보려 발버둥 치며 노력했던 시간도 있었다.


사랑을 받지 못해, 버림받아서 분노가 쌓일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생각하며 이해해 보려 애썼다.


아버지와 같이 살고 마주치는 순간에는 늘 폭력의 대상이 되니 이런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내가 성인이 되어서 그제야 아버지의 폭력은 멈췄다.


자신의 화를 주체 못 해 나의 뺨을 때린 것 외에는 큰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나보다 크고 무서웠던 아버지가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한 때는 제발 저 인간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먹고, 매일 장미 담배 한 갑을 피우고, 수두룩하게 오토바이 사고가 나도 멀쩡했다. 불사조 같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퀵배달을 가다가 종로 한복판에서 멈췄다.


전기선이 끊어지듯 아버지의 뇌의 회로가 툭 끊어진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큰오빠, 작은오빠, 나. 모두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 것이다.


갑자기. 불시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우리는 모두 효자 효녀가 된 것처럼 아버지 곁에 있었다.


아버지는 '뇌경색'이었다. 그로 인해 언어의 문제와 인지의 문제가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아버지의 모든 기능은 서서히 나빠지고 죽어갔다.


아버지는 말을 못 하지만 내가 왔을 때 좋아하는 것이 느껴졌다. 걸을 수 있을 때는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를 기다렸고, 말할 수 없을 때에는 나만 알아봤다.


나중에는 좀비처럼 누워서 눈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왜. 이렇게 안 왔어. 이 놈들아.'


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병원을 여러 번 옮겼다. 낯이나 밤이나 분노를 표출하고 공격적이라서  다른 환자들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점점 나빠지다가, 종로에서 쓰러지고 일년도 안되서 돌아가셨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죽는다는 것은...


아버지 죽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다짐은 아버지의 몸이 화장터에서 가루가 되었을 때 무너졌다. 이렇게 작은 항아리에 담길, 한 줌 밖에 안 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밖에 살지 못했을까. 그 인생이 너무 불쌍했다. 단 한 번이라도 인생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죽어버린 아버지의 인생이 애달팠다.


화장을 하기 전에 염을 하고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하는 시간이 있었다. 세상 평온하고 걱정 근심이 사라 진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아버지의 '예쁜(?)'모습이었다. 아버지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던 세상 예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조금의 위안(?)을 삼았다. 아버지는 어쩌면 인생의 고난과 고통이 없는 지금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살면서 행복을 한 번이라도 느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죽은 지금에서야 발견했다.


자주 잡지 않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한마디 한다.


"아버지. 고생했어.''



나는 나의 지난 들을 쓰며 내 머릿속의 글들을 일사천리로 써 나갔다. 그런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글을 쓸 때만큼은 몇 번이나 멈췄는지 모른다.  고장 난 브레이크를 꽉 하고 밟을 때처럼 몇 번이나  끼익 끼익 멈췄다.


두줄 쓰고 멈추고 두줄 쓰고 멈췄다. 숨이 턱턱 막혔다. '휴, 휴'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고 숨을 내뱉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아무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올케언니는 갖다 버리라고 했는데 차마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거리에 쓰레기로 버릴 수 없어 가져왔다.


신문지에 싸서 창고 어딘가에 놓고 잊어버렸다. 나는 엄마의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 아쉬웠다. 그러니 아버지의 잘 나온 사진을 한 개라도 가지고 있는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내가 왼쪽으로 몸을 움직여도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여도 시선이 따라온다. 마치 살아계신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 지금. 괜찮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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