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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Aug 07. 2024

살아 갈 이유를 찾고 싶어 글을 쓰다.

치유의 시작

 내가 글을 쓰기 시작 한건 나 자신을 치유하려고 시작했다. 가슴속의 들끓는 이야기를 쏟아놓지 않으면 어느새 빵 하고 터질 것만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쓰기 시작했다. 정말 가슴이 터져 죽을 것 같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머릿속의 이야기를 꺼내서 나열하기만 했을 뿐인데 글 한편이 나왔다. 마치 어젯밤에 꾼 꿈처럼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서 내 주변을 맴맴 도는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었다.


희한하게 그 모든 글들은 마치 내가 세상 밖으로 꺼내주길 바란 듯 봇물이 터지듯이 나왔다.

내가 모두 겪었던 실제 상황이니, 그 어떤 글도 만들어 낼 필요 없이 꺼내놓기만 하면 됐다.


평생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도 될 일을 꺼내놓은 건 내가 살기 위해서였다.


조금만 힘들어도


'내가 왜 살고 있지? 이제 그만하고 싶다. '


늘 속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나를 말리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다.

실제로 글을 쓰다 보니 고맙고 은혜받은 일들이 생각이 나서 한결 마음이 좋아지기도 했다.

 

 자꾸 삶의 의지가 약해지는 나를 말리고 싶었다.  

아직 키워야 될 자식이 있는데도 나는 아이들이 조금만 힘들게 해도


"너희들이 그러면 엄만 살기 싫어."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게 된다. 막내는 그런 엄마의 소리를 듣곤


"엄마 말 잘 들을게." 그런다.


이미 다 큰 자식들이야 엄마 맨날 저렇지 하고 넘기겠지만 막내는 얼마나 무서운 말일까.

안 해야지 하면서도 그 순간의 진심이 툭 튀어나온다.


그래서 글을 써서 어떡해서든 살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왜 죽고 싶은지도 알아내야 했다.


나는 힘든 일 다 이겨내고 잘 살고 있고, 이제 우리 가정을 정상 궤도에 올려놨는데 도대체 왜 그러지. 너무 답답했다. 이런 마음이 드는 자체가 너무 불안했다.


다행히 정말 다행히 글을 쓰는 말미에 내가 왜 그런지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의 어두운 마음의 실체는 '가족의 폭력'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내가 왜 힘들까 어렴풋이 심증은 있었지만 글을 쓰며 알아낸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의 상처를 하나하나 직면하는 시간이었다.


때로는 그때와 똑같은 고통이 느껴져서 많이 힘들었다.

글을 쓰며 많이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셋째 넷째를 키우지 않았다면 이 작업을 영원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 또 살기 위해 버티는 일만 했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을 키워야 했기에 죽으면 안 되니까 어떻게든 살 방법을 찾으려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똑바로 서지는 못했다. 그런데 딛고 잡을 지팡이 하나는 찾은 거 같다.


나는 살아야 한다. 아직 우리 아이들을 다 키우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행복한 거를 조금씩 알아가는데 오래도록 누리고 싶다.


내가 외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고 싶다.




'작가?'


'작가님'


'작가 나부랭이'


무엇이든 좋다. 아무렇게나 불려도 좋다. 나는 막연히 작가가 되고 싶었나 보다. 나는 작가가 될 운명이었나 보다. 막연히 선망의 대상이라고만 여겼던 일들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돈을 많이 버는 일도 아니고 큰 명예가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왜 작가가 되고 싶었을까...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은 내 마음을 몰랐을까...


생각해 보면 나는 어려서부터 누군가 하고 끊임없이 대화를 했던 것 같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끊임없이 인터뷰를 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그렇다. 좀 이상하긴 한데, 상상의 사람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다. 그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가의 뇌구조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작가로 불리어지고 싶은 지금은 글을 쓰는데 너무 많은 도움이 된다. 머릿속에서 하던 인터뷰를 글로만 적어내서 나열하면 되니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글을 쓰는 것을 배운 적도 없고 꾸준히 글을 쓰던 사람도 아니다. 불과 몇 달 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왜 이제야 쓰기 시작했는지 후회했다.


왜냐면 나는 글을 쓰고 놀랍도록 건강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 상처받지도 않고 세상이 먹구름도 아니다. 잿빛 세상을 매일 걸어가고 있었는데 이제 선명한 세상을 걸어가고 있다.


나는 내가 쓴 글을 읽고 또 읽고 수도 없이 읽으면서 상처가 아물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내 이야기를 너무나 잘 들어주는 글이라는 '친구'가 생긴 것이다.  글 속의 나는 또 다른 나이기에 나를 너무 잘 이해한다.


브런치에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일기장에 쓰지 않고 브런치에 글을 썼을까.


티브이에 복면가왕이라는 프로가 있다.  가면을 쓰니 더욱 용감해지고 안 하던 짓(?)을 하게 되기도 한다.  내가 그렇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안 하던 짓(?)을 맘껏 하게 된 것이다.


가정의 수치스러운 일도 용기 있게 내어 놓게 된 것이다.


나와 오래 알았던 아는 동생이 내 글을 읽고 그랬다.


'언니를 너무 몰랐어."

'글을 보니 언니를 이해하게 됐어."

그런다.


도대체 이런 수치스러운 일은 누구에게 맘껏 털어놓을 수 있을까. 평생 꽁꽁 감춰두기만 하니 나를 알던 사람도 나를 모르는 것이다.


내 속에 끓어 넘치던 글을 밖으로 내어 놓으니  후련하다. 이제 숨이 쉬어지고 이제 살 것 같다. 일도 하고 애들도 볼 수 있다. 뭐 넘어질 수도 있겠지. 항상 전쟁을 준비하는 특전사처럼 일말의 불안함은 있다. 지금은 그렇다는 것이다.


브런치에 글을 쓴 이유는 위로받고 싶어서이다. 나를 다독여주고 나를 안아주길 바란다. 그런 적이 없다. 그동안 나는 너무 씩씩했다.


이제 글이라는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나를  사람이라도 알아준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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