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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Aug 09. 2024

아기가 되어버린 작은 오빠

작은 오빠에게 다녀오다.

작은오빠는 코로나 전에는 남양주 먼 골짜기 요양병원에 있었다. 차가 없던 때라 잘 가지 못했다.  코로나 바로 전에 양주에 있는 ** 요양원으로 옮겼다. 꽤 가까워진 것이다. 코로나 때는 아예 못 갔고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갈 수 있는데도 못 갔다.


아버지처럼 뇌경색이 와서 아기처럼  대소변도 못 가리고 먹는 것 외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빠지기만 한다.


항상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가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마음속의 무거운 숙제처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 문제에 몰두해 있다 보니 소홀했다.


그동안은 올케언니와 오빠가 자주 갔는데 재작년부터 사정 상 두 분이 이제 못 가게 됐다. 더 이상 작은 오빠를 챙기지 못하게 됐다.


나는 아이들 키운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고, 운전이 미숙하다는 핑계로 계속 못 갔다. 올 초에 아는 집사님께 운전을 부탁하여 한번 갔다 오고,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갔다.


이번에는 큰 딸이 모처럼 휴가라서 어디를 갈까 하다가 작은오빠한테 가기로 한 것이다. 내가 운전해서 갔다. 그동안 각종 핑계로 안 갔는데 딸아이가 있으니 용기가 났다.


오빠는 휠체어를 탄다. 기저귀도 찬다. 우리 큰애를 보더니 "많이 컸네"  한다. 알아본다. 지난번보다 표현이 늘었다. 나를 아냐고 하니 "OO이" 하고 내 이름을 말한다. 오빠는 주머니에서 건빵을 하나씩 꺼내서 연신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 또 한 개씩 꺼내서 우리한테 나눠준다.


"하루 종일 뭐 하고 지내?" 하고 물어보니 "누워있어." 한다. 언어 소통이 많이 좋아졌다.


건빵을 계속 씹어 먹던 오빠가 갑자기 먹던 것을 멈춘다.  좀비처럼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건빵 먹던 것을 멈추고 눈을 맞추더니 한마디  한다.

 

"행복해."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되묻는 나다.


"행복해?"


"응"


행복이라니. 살면서 오빠한테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다. 오빠의 행복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간병하시는 분이 동생이 와서 오빠가 좋은가 보다 설명해 주신다. 다른 환자들을 보며 많이 부러워했던 모양이다.


'이곳에서는 보호자들이 오는 게 행복이구나.'


오빠 입에서 나오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괴리감이 느껴졌다.


오빠는 살면서 그렇게 행복한 적이 없던 사람이다. 세상과 인생에 불평불만이 가득했던 사람이다. 오빠의 인생에 행복이란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다. 


제일 불행할 것 같은 이 공간에서 행복해라는 말을 듣다니...


오빠는 가져간 빵을 크게 떼어서 입으로 우적우적 먹는다. 목이 막힐 지경이다. 간병인이 오빠의 식탐을 말려도 재빠르게 빵을 입에 집어넣는 오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큰애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어릴 때 용돈도 주던 외삼촌이 저리 된 것이 슬프고, 행복해라는 단어를 듣고 더욱 슬퍼했다.  큰애의 눈물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차 안에서 계속 울었다.


나도 눈물이 났지만 애써 담담한 척 감정을 눌렀다. 울고 싶었지만 울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려서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 중 하나였으니 너무 많이 슬퍼하기도 어려웠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내가 오빠 행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구나.'


분명히 울어야 되는데 울 줄 알았는데 울음이 밖으로 나오지 않고 멈춘다.


나는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힘들었었다. 한 발짝도 걸음을 옮기기 힘들었다. 그저 자식들을 위해서 소진될 뿐 행복을 느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글을 쓰고 마음이 많이 괜찮아져서 오빠에게 가 볼 힘이 생긴 것이다.

 

"엄마. 자주 오자. 우리가 오면 행복하데잖아."


얼른 답을 안 하는 나에게 재차 묻는다.


"응?"


"그래야지. 그래."


나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 일을 오빠의 행복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가족이니까. 피붙이니까. 내가 오면 행복하다니까.


큰애가 나의 가족의 일에 같이 울어주니 외롭지 않다. 나는 그런 게 필요했다.


'내 슬픔에 같이 있어 줄 사람.'


혼자는 용기가 안 난 것이다. 하나도 웃을 일이 없는 일에 혼자 가 볼 용기가 안 난 것이다. 우리 가족의 슬픔에 외로이 직면할 자신이 없던 것이다.


집에 오는 길, 오전에는 오지 않던 비가 갑자기 차창 앞문을 세차게 두드린다. 그럼에도 희한하게 오는 길이 하나도 힘들지 않고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먼 것 같고, 천리만리 같았는데 금방 집에 도착했다.


'내가 오는 게 행복하다고?'


'내가 오는 게 행복이라고?'


내가 생각한 오빠의 지금 상황은 인간으로서의 제일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상황이 무기력해진 지금 오빠는 행복을 알게 된 것이다.


오빠가 저리 된 게 너무 안타까웠는데 그 안에 작은 행복을 알았다면 그것에 감사한다.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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