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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gaya Sep 24. 2024

평생 어정쩡한 언어'들'

대학교 때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잘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일찌감치 미국 연수도 다녀온 친구죠. 당시 영문학과 학생들은 문학과 언어학 중 세부 전공을 택하는데, 자연스레 문학 다수, 언어학 소수로 나뉘었습니다. 영어 잘하는 그 친구는 내겐 마치 수학 수업 같던 언어학 시간에 날아다녔습니다. 필수로 들어야 했던 몇 개 언어학 수업은 나 같은 사람에겐 가시방석이었습니다. 대충 아는 척하고 앉아 있을 수 있는 문학과는 달리, 갓 부임한 열정 넘치는 언어학 교수 수업에는 지목받을까 봐 늘 몸 사리곤 했습니다. 졸업 후 친구는 미국에서 언어학과 영어교육 석사를 공부했습니다. 나는 호주에서, 그 친구는 미국에 있던 시절 하루는 친구가 말했습니다. "영어로 생활하면 좀 모자란 사람이 되는 느낌이야. 외국인으로서 영어를 배우고 가르치려면 한계부터 확실히 받아들여야 하니까. 외국인은 아무리 날고 기어도 2% 부족해." 친구 말에 왠지 맥이 풀렸습니다. 당시 호주에서 "영어 잘한다!" 소리 들으면 진짜인 줄 알았으니까요. "영어 잘한다!"라고 하는 건 우리가 한국말 좀 하는 외국인에게 "한국말 너무 잘한다!"라고 칭찬하듯 그저 스몰토크였을 텐데 말이죠. 호주에서 오래 사신 교민 중 영어를 잘 못하는 분을 보면 젊은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한인 사회에서만 사셨구나. 난 저러지 말아야지!" 20대 초반인 나는 어디든 한 5년 거주하면 그 나라 말은 유창할 것 같다고 자신했습니다. 5년은 못 채우고 2년 후 다시 한국에 돈 벌러 돌아갔으니, 한참을 더 그렇게 오해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압니다. 언어는 '도구'일 뿐이며 외국에 산다고 네이티브 스피커처럼 말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요. 수많은 외국인이 그 나라 말을 유창하게 못 해도 만족하며 살고, 오히려 껍질인 언어에 너무 신경 쓰다 사회성까지 퇴보하는 예도 있다는 걸요.   


또 다른 시련, 독일어     

호주를 떠나 한국에 돌아와 다니던 직장은 특허법률사무소였습니다. 그곳에서 독일어를 배우라는 명(?)을 받고 처음 독일어를 접했습니다. 인천에서 서초동으로 출퇴근하며 아침에 회사 근처에서 독일어 초급반을 매일 들었습니다. 야근도 종종 하던 때라, 두 달 버티다 독일어 못 배우겠다고 백기를 들었죠. 학원을 관두고 다시 원래 하던 업무만 생각하면 됐습니다. 신입 사원에게 독일어 아베체(ABC)를 가르쳐 언젠가 특허 신청서를 작성할 거라고 소장님은 믿으셨을까요? 아니면 사원 자기 계발 투자였을까요? 중도 포기는 했지만, 결국 여차저차 독일에 터 잡고 살고 있으니 내 독일살이에 소장님 지분도 한 0.01 퍼센트는 있을지 모릅니다.   


배낭여행 중 독일에 꽂혀서 결국 유학 오게 됐고, 어느새 20여 년 독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젊은 내가 5년이면 그 나라 언어가 유창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일이 아득합니다. 내 독일어는 C1 수준에 머물렀고 그나마 아이가 태어난 후 체감상 B로, A로 죽죽 내려가는 중입니다. 영어가 확 늘었던 시기는 호주에서 영어로 공부하던 시절이었는데, 아무래도 독일 대학에서는 영어로 공부했기에 독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절대적 시간이 부족했죠. 영어로도 생활 가능한 베를린에 살아서 그렇기도 합니다. 지금도 베를린 도심 식당, 카페에서는 내가 독일어로 얘기해도 영어로만 대답하는 직원이 있습니다. 좀 얄밉습니다. 넌 외국인이니 영어로 해줄게, 인 거죠. 한국인 지인 중에는 독일인과 서로 영어로 말해야 동등하게 느껴져 영어를 선호하기도 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독일어에 근 20년 어정쩡하게 발목 잡혀 있습니다.


대학 울타리 vs 사기업

독일에서 대학이라는 선하고 열린 공간에서는 낙관했습니다. 독일어? 언젠가 확 늘 거야. 일단 요번 과제만 제출하고 보자. 그러다 베를린에서 작은 바이오기술 회사 직원이 되면서 정글이 시작됐습니다. 미국, 한국, 독일인이 섞여 있던 회사였지만 급한 일은 독일어로 처리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작은 회사라 수시로 응급 상황이 생겼습니다. 통관 지연 문제, 본사 회계 감사, 실험실 사고 등은 독일인 위주로 속사포 쏴가며 해결하곤 했습니다. 배려보다 효율이, 정확한 이메일보다 빠른 전화 통화가 우선인 작은 사기업이었습니다. 전문 기술 없는 사무직이던 나는 중요도 상중하 중 하를 맡으며 점점 더 단순 업무로 밀려났습니다. 독일어 벽에 심하게 부딪혔습니다. 그때라도 몸을 갈아 넣어 더 노력했다면 달랐을까요? 신입이 야근과 독일어 아침 수업을 병행하던 한국만큼 빡센 건 아니었는데 말이죠. 아무튼 현실은 정글이었고, 1년 3개월 치이다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임신한 몸으로 뜻밖에 내 모국어 관련해 낯선 이들에게 격려와 오지랖을 듣게 됩니다.


(커버 이미지: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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