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유학생, 박사과정생, 알바생, 정직원, 프리랜서 번역가, 그 와중에 결혼과 육아를 하며 3인 가족을 유지 보수해 나가고 있는 이주 노동자로서 내 소비원칙을 검토해보려 합니다.('프리랜서' 옷을 입은 고된 문자 ‘노동자’입니다!) 출산 후 1년 육아 휴직 기간을 제외하면 어떻게든 크고 작은 돈을 벌며 생계를 이어왔습니다. 현시점의 지배적 정체성은 아무래도 ‘외국인 엄마’ 같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후 한국과 독일에 한 발씩 담그고 삽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 년에 한 번(독일 가족과), 최대 두 번(혼자)을 한국에 가서 지내고 와야 독일 일상을 견딜 수 있습니다. 멋쩍지만 탄소 발자국을 어마하게 남기는 중이죠. 대신 25년째 채식 지향인으로 살며 옷 포함 물질 소비는 거의 없다시피 하니 천하 몰지각한 지구인은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건강과 경험은 YES, 물건은 NO
외노자로 살아가는 소비 원칙은 단순하고 상투적입니다. ‘건강과 경험’에는 아끼지 말고 쓰되, ‘물건’은 1유로짜리라도 꼭 필요한 것만 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경제 공동체인 남편과 11살 딸의 물건 사랑까지 일일이 통제할 수는 없지만요.
의·식·주
유학생 시절엔 비좁은 기숙사 방에 맞춰 세간살이도 최소였고, 밥은 싸고 양 많은 학생 식당에서 감사하게 먹었습니다.(아니, 누가 독일 음식이 맛이 없답니까? 양 많은 멘자 점심 거나하게 먹고 나면 포만감에 저녁은 가격 착한 과일과 치즈로 때우는 날도 있었으니 가성비 최고였는 걸요!) 널리 알려졌듯이, 독일 마트 식료품 가격은 착합니다. 좋아하는 과일, 채소, 유제품을 맘껏 사잴 수 있습니다. 옷은 적적하신 엄마가 한국서 사 모으셔서 가끔 소포로 반찬거리와 함께 보내시거나 친히 가지고 오셨습니다. 엄마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지금도 그 당시 보내주신 20년 넘은 옷들을 잘 입고 있습니다. 비결은 간단합니다. 옷은 빨수록 상하기 때문에 더럽지 않다면 입은 옷을 바람 잘 드는 곳에 걸어두어 냄새와 습기를 빼면 여러 번 입은 후 빨 수 있습니다. 물, 전기, 옷감 아끼기 원칙입니다. 물론, 암내 안 나는 한국인이라 가능합니다. 지금은 구하기 힘든 2000년대 초반 한국 옷이 많아 더 소중히 다룹니다.
2011년, 동네 사람과 눈이 맞아 가정을 꾸렸고 아이가 3살 때 대출받아 2016년 베를린 남서쪽 반제(Wannsee)에 작은 집을 샀습니다. 착실하게 빚을 갚아 곧 2026년에는 나머지 빚을 어떤 조건으로 갚을지 결정할 수 있고, 그때가 되면 일시금으로도 낼 수 있을 정도의 금액만 남게 됩니다. 내 집이 생기는 경험, 큰 빚을지는 경험, 빚을 열심히 그리고 '빨리' 갚아 원금이 쑥쑥 줄어드는 걸 보는 경험은 재미있고 또 치열했습니다. 말 없고 행동 느린 남편에게 "우리 빚 얼마 남았더라?"라고 물으면 예외적으로 빠르게 엑셀 시트 확인 후 알려줍니다. 없던 동지애도 확 솟을 치트키 질문이죠. 고정 수입이 있는 남편이 대출금, 관리비를 감당하고, 나는 아이 키우는 데 드는 소소한 비용과 연초에 뭉텅 나가는 여행 경비를 댑니다. 딸은 아직 어려서인지(7학년, 한국식 중1) 사교육비라고 할만한 게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한글학교가 현재 딸에게 들어가는 유일한 고정 사교육비인 셈입니다.(비영리 단체인 베를린 한글학교 한 달 학비는 35유로, 약 5만 2천 원) 아무튼, 한국인 특유의 ‘후딱’ 근성으로 특별 상환 최대치로 매년 목돈을 은행에 갚았습니다. 느린 성격에 워낙 안정적인 걸 좋아하는 독일 남편은 왜 그렇게 큰돈을 특별 상환하냐고, 비상금으로 일단 가지고 있어도 된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전 빨리 빚이 줄기를 원했습니다. 지금은 남편도 흐뭇해하죠.
의식주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집값'을 해결한 게 삶을 안정적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언제 일감이 끊길지 모르는 프리랜서지만 저금리 막차를 운 좋게 얻어 탄 2016년 이후, 들쑥날쑥 월소득에 예전처럼 그리 조바심 내지 않았고 한국병도 조금씩 치유되는 느낌입니다. 물론 완치야 불가능하지만요.
등골 휘는 한국 방문 비용
지출에서 가장 큰 부분은 한국행 비행기표 포함 여행비용입니다. 유학생, 직장인 시절에는 한국 음식이나 한국말 수다가 그립지 않았는데, 아이가 태어난 시점부터 향수병에 걸렸고 그건 불치병이었습니다. 호주와 독일에서 산 기간이 매우 긴 해외 생활 백 퍼센트 유 적응자였는데, 임신하고 이런저런 한국 음식이 먹고 싶더니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한국말만 하고 싶어 졌고, 서양식을 3일 이상 먹으면 김치 친척 사우어크라우트를 토스트 위에라도 얹어 먹어야 덜 느끼했습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 언니, 절친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설득해 한국으로 역이민 할 계획을 세워 봤지만, 조금 알아보다 긴 노동시간, 높은 집값, 아이 교육 등 현실에 부딪혀 그냥 독일에 눌러앉기로 했습니다. 일단은요. 아직은요. 그 후 집을 사게 됐습니다. 아마 60세 정도까지는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살지 않을까 싶습니다. 향수병을 살살 달래 가며 타협점을 찾은 지금의 삶도 제법 맘에 듭니다.
매년 1월 초면 한국행 비행기표부터 쇼핑합니다. 그리고 종교 휴일이 많은 5월을 위해 소소한 유럽 도시 여행을, 여름 방학을 위해 지중해나 홍해 여행도 일찌감치 예약해 둡니다. 그렇게 해서 내 몫의 지출 대부분은 비행기 삯, 숙박으로 연초에 뭉텅 나갑니다. “그래, 대신 난 옷도 안 사고 화장품도 저가 마트 제품이고, 오페라 티켓값은 착하잖아!” 이렇게 위로합니다. 연초에 여행비용을 해결해 두면 맘이 편합니다. 돈이 잘 벌린 해면 다음 해 가족여행이 잦고, 돈 못 번 해는 한국 방문이면 족합니다.
게다가 좋아하는 운동은 가성비 갑인 달리기입니다. 뛰어서 1분이면 숲길을 달릴 수 있고, 다른 방향으로 3분 뛰면 호수 풍경을 즐기며 달릴 수 있습니다. 지난 2년간 3번 하프마라톤을 완주했습니다.
얼마 전 오십이 된 제게는 크게 아프지 않고 나름 잘 기능하는 몸이 있고, 한국말 유창한 11살 딸이 곁에 있고(사춘기야, 천천히 오렴), 요리 담당 게르만 짝꿍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더욱 사랑하게 된 생업이 있습니다. 번역, 창작번역, SNS 관리, 인터뷰, 편집 등 텍스트 관련 일을 해오며, 이제는 나보다 훨씬 똑똑한 번역 툴을 조수로 활용합니다. 번역 업계 지각변동은 코로나를 거치며 가속화했고 언제까지 일감이 들어올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또 나를 확장하고 변형하고 업그레이드하며 뭐든 찾고 배워 나갈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적응하며 살아왔듯이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딸이 만 4살 혹은 5살 무렵부터 내가 가끔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너에게 가장 중요한 건 건강(Gesundheit), 우정(Freundschaft), 그리고 너의 예술(Kunst)이야.” 딸이 친구와 갈등이 생겨 속상해하거나, 수학 점수를 못 받아 왔거나, 키 작다고 놀림당할 때 이런 말을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건 나에게 거는 주문과도 같습니다. 내 건강,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한국 방문 포함),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생업(글쓰기)과 취미(오페라, 책, 영화)를 위해서는 조금은 관대하게 소비하고 싶습니다. 예술가연금공단(KSK)에 가입한 후로는 대부분 책값, 문화 생활비도 세금 공제 서류로 일단 제출하고 봅니다.
그리고 딸의 유창한 한국말을 더욱 갈고닦는 데만큼은 아낌없이 투자하고 싶습니다. 이건 딸과 오래도록 모국어로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 나를 위한 투자이기도 하니까요.
(커버 이미지: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