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첫인상은 춥고, 활기차고, 시끄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매년 12월 31일, 한국엔 종로 보신각 타종이 있다면, 독일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연말 파티(실베스터)가 있습니다. 남부 바이에른주 외국인 유학생이던 나는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실베스터를 즐기러 베를린으로 며칠 관광 왔습니다. 걷는데 시도 때도 없이 폭죽이 터졌고, 가끔 바로 옆에서 불꽃이 일어 입고 간 옷에 튀지 않을까 조심했습니다. 2002년 12월 말이었습니다. 통일 후 건설 붐 일던 베를린은 특유의 음울한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낙관과 활력이 넘쳤습니다. 독일의 통일 수도가 된, 젊고 진보적인 베를린 '클리셰'는 모두 들어맞았습니다. 게스트 하우스에 묵으며 주요 관광지에 발 도장 찍은 후, 밤이면 유흥 가득한 크로이츠베르크와 플렌츠라우어베르크 거리를 활보했습니다. 내가 꿈꾸던 베를린은 그런 내 확증 편향 덕분에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때, 관광객이 아니라 이곳 거주민으로 다시 베를린에 오겠노라 다짐했습니다.
베를린 '클리셰'
베를린 하면 내게 떠오르던 이미지는 자유로움, 개방성, 예술, 젊음 등이었고, 필하모니, 분단, 동백림 사건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괴짜 가수 닉 케이브, 독보적 아티스트 데이비드 보위는 서베를린에 매료되어 이곳으로 이사해 활동했었고, 틸다 스윈턴도 서베를린에서 관련 다큐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도시의 아우라가 반골 기질의 독특한 스타들을 끌어당겼나 봅니다. 2개월 거주했던 부유하고 친절한 뮌헨도 참 좋았지만, 가난하고 무심한 베를린이 나와 더 궁합이 맞다고 느꼈습니다. 짧은 첫 방문에서 베를린 '클리셰'에 만족해 목표를 세웠고 몇 년 후 베를린으로 돌아왔습니다. 거주 허가용으로 학교에 적을 둔 박사과정생 신분이었지만, 학구열에 불타지도 않았고 박사를 따리란 야망도 없었습니다. 단지, 내가 느낀 몇 년 전 베를린 거리의 자유로움에 꽂혀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인 '학생 신분'으로 입성했을 뿐입니다.
포근한 대학 울타리
외국인 유학생에게 독일 대학은 개방적이고 선량한 공간입니다. 어디든 경쟁은 있지만, 공부하러 온 외국인에게 교수와 동료 학생은 대개 친절하며 독어보다는 우리와 영어로 소통하길 즐기는 경향도 있습니다. 나중엔 그런 대우가 좀 싫긴 했지만요. 공부에 큰 뜻이 없던 나는 어차피 한국 회사와 해오던 번역 일을 짬짬이 이어가고 있었고, 이제 마음껏 이 도시를 탐험할 일만 남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열리는 크고 작은 미술, 음악, 연극 공연을 보며 늦도록 쏘다녔고, 한인 학생들과도 자주 의기투합했습니다. 2006년 말부터 2010년까지, 4년을 베를린이 주는 여러 문화 혜택을 마구 즐겼습니다. 지금은 뮌헨 다음으로 집값이 비싼 도시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저렴한 기숙사 월세와 학생 혜택을 누릴 수 있었죠. 젊은 층을 위한 문화 혜택 '클래식 카드'를 만들어 싼값으로 슈타츠오퍼, 도이치 오퍼, 베를린 필하모니 공연을 보러 다녔습니다. 코미셰 오퍼까지 더하면 베를린에는 무려 3개의 오페라 극장이 있습니다. 연방정부 지원, 주정부 지원을 받는 오페라 극장들이 착한 티켓 값으로도 뛰어난 공연을 올릴 수 있는 이유입니다.
친구의 친구가 여는 미술 전시회에서 축하를 빙자해 음료를 들며 새벽까지 노는 것도 즐겼습니다. 미술 작품이 실제로 팔리는 런던 같은 도시가 아닌 (가난한) '베를린' 특성상 수많은 신진 작가는 본인 전시회 오프닝에 친구의 친구, 사돈의 팔촌까지 끌어오길 늘 바랍니다.
장학금을 받고 시작한 박사과정이 아니었으므로, 누가 진척 상황을 따져 묻지 않았고 박사 지도 교수님은 여느 독일 학생 대하듯 스스로 알아서 논문을 쓰길 바라셨죠. 마음은 콩밭에 가 있고, 지지부진한 논문은 얼개가 허술해 보여 밀쳐두고만 있었습니다. 결국 공부보다 일을 택해 2011년 한국 바이오 기술 회사의 베를린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따뜻한 대학 울타리 너머에 도사린 정글을 체험합니다. 더는 학생 혜택도, 도와줄 교수님도, 언제든 방문할 수 있는 무료 심리 상담사도 없었습니다.
직장인 비애는 만국 공통
사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 이곳 대학교 환경이 얼마나 인심 좋고 우호적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독어, 영어, 한국어를 잘한다는 '이력서상 나'는 순발력이 필요한 위기 국면에선 독일인 직원들 틈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습니다. 직설적인 독일 동료와 상사는 철저하게 실용적이었기에, 진즉 내 실력을 파악하곤 급하지 않거나 중요도가 떨어지는 업무를 내게 넘겼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래저래 직장 생활을 해봤건만, 언어로 인해 열패감이 든 건 처음이었습니다. 회사 생활 유일한 장점인 칼퇴근을 기다리며 나는 활력 넘치는 이 도시에서 이렇게 미지근한 직원으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 자문하곤 했습니다. 그때 회사는 관광지 한 복판인 프리드리히 슈트라세에 있었고, 집은 역시 유흥 중심지 놀렌도르프 플라츠였습니다. 단, 학생 때처럼 밤 생활을 즐길 여력도 없었고, 이런저런 공연도 시들해졌습니다. 나를 강력하게 잡아당겼던 베를린 매력을 즐기지 않는다면 과연 이곳에 계속 머물 이유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월급쟁이 생활은 서울이든 베를린이든 고만고만한 것 같았습니다. 저녁엔 밥 먹고 쉬고, 주말엔 자전거로 운동한 후 영화를 보거나 공들여 요리했습니다. 그런 생활은 세계 어디서도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놀렌도르프 플라츠에 살며 남친과 결혼했고, 베를린 생활에 의문을 가질 즈음 커플용 아담한 공간에 보석 같은 아기가 찾아왔습니다. 방 하나, 거실 하나인 작은 집 여기저기 기저귀 박스, 아이 장난감이 쌓이고, 한 방에서 셋이 오밀조밀 자면서 우리는 집 장만을 계획했습니다. 당시 살던 놀렌도르프 플라츠는 걸어서 갈 수 있는 한국 식당이 무려 세 군데나 되고, 유명한 맛집과 카페가 늘어선 번화가입니다. 대형 유기농 마트도 있고 주말 장이 서면 지역 농산물, 단골 치즈 트럭, 감자 트럭 상인들과 수다를 떨 수 있는 곳입니다. 게이 서점, 게이 호텔 등이 있고 동성애 관련 행사도 수시로 열리는 개방적인 동네입니다. 커플이 살기에 인프라가 매우 좋았지만, 우린 일단 아이 방이 절실했고 엘리베이터 없는 백 년 훌쩍 넘은 건물 5층을 아이와 매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무수한 시도, 거절, 협의 끝에 결국 남서쪽 푸르른 반제(Wannsee)에 집을 살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3살이었고, 우리는 유흥가에서 조용한 교외로 이사했습니다.
힙한 베를린 대신 숲과 호수의 베를린
은행에 거금을 빌려서 호수 많은 동네 작은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어린이집과 초등학교가 가까웠고 멧돼지 가족들이 사는 드넓은 숲 바로 옆이었습니다. 이 동네 모든 쓰레기통은 육중한 철문을 열고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밤에 멧돼지들이 들어와 버린 음식을 뒤져 먹을 수 있기 때문이죠. 도심 한복판에 살다 자동차가 필수인 인구 밀도 낮은 교외로 오자 불편한 점도 생겼습니다. 우선 맛있는 식당과 카페가 아쉬웠고, 친구를 초대하거나 만나러 나갈 때면 꼭 버스를 타고 전철역으로 이동해야 했죠. 이웃 주민 평균 연령대가 갑자기 높아졌고, 외국인 넘치던 옛 동네와 비교하면 참으로 독일다웠습니다. 동네에 그나마 일본인 국제학교가 있었는데, 나는 항상 기대감과 호기심 어린 눈인사를 시도하며 일본인 가정과 스쳐 가곤 했습니다. 아쉽게도 아시아 친구는 사귀지도 못한 채, 그 일본인 국제학교는 랑크비츠라는 좀 더 먼 동네로 옮겨갔습니다.
조금 심심해질 즈음에 코로나 국면이 시작됐고 우리는 숲과 호수로 매일 나가 달리기, 인라인, 킥보드, 자전거를 탔습니다. 학교도 문을 닫은 코로나 시절, 그나마 탁 트인 호수와 울창한 숲으로 자주 산책 나가 놀면서 그제야 새 동네에 감사하게 됐습니다. 군데군데 있는 크고 작은 호수, 바다 같은 하벨강은 깊은 푸른색으로 내게 안정감을 줬습니다. 달리기에 취미를 붙인 것도 코로나 즈음입니다. 처음으로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왔으니, 새집을 만들어 나무 위에 달고, 깻잎, 루콜라, 토마토, 민트, 감자를 심고, 해바라기, 수국, 장미를 가꿨습니다. 마당의 녹색과 집 나서면 바로 보이는 숲의 녹색이 베를린의 또 다른 혜택으로 느껴졌습니다. 여전히 한국을 그리워하고 아이가 성인이 되면 1년 중 6개월은 한국서 살겠노라 노래를 하지만, 더는 힙한 베를린이 아니어도 초록과 파란 호수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베를린도 큰 만족감을 줍니다.
아이와 남편이 학교와 회사로 떠난 아침 8시면 모든 창문을 열고 이불을 널고 집 안을 환기합니다. 나는 이제 작업실에서 4시간 내리 번역을 할 터이고, 1시간 운동을 할 터이고, 맛난 점심을 먹을 터이고, 토끼 같은 아이가 돌아오면 줄 간식을 준비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나는 옆에서 한국문화원에서 대출한 한국 소설을 아껴가며 읽을 것입니다. 밖에는 이웃집 강아지가 가끔 소통하는 소리 외에는 조용합니다. 잠시 직장인 시절, 그리고 출산 후 고비가 있었지만, 결국 베를린에 둥지 틀고 새끼 품으니 것도 나름 지낼만하구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