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라이킷 19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다시 찾은 평화

[우울증 환자 생존기] 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by 마담 J Jan 27. 2025

지난 월요일이 예정된 면접이었으니까, 일주일이 지났다. 30분 글쓰기를 하다보니 내가 숨을 잘 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숨 쉬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면접 불참 통보를 하고 하루 이틀 지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몸은 정직하다. 내가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해주는 중요한 구분자는 몸이다.


어릴 때부터 허약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까만 아이가 키만 크고 깡 말라서 보약도 많이 먹었다. 나중에는 먹기 싫어서 도망다니다가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아가면서 먹었다. 할머니가 뒤로 숨겨주고는 했는데, 피할 길이 없었다. 감기도 달고 살고, 고열에 시달리고, 코피도 한 바가지씩 흘려서 가까운 곳으로 전학도 했다. 20대 중반까지 모든 환절기에 감기를 했다. 어릴 때 항상 열 감기를 해서 청소년기부터는 열 감기는 안 했지만, 대신 늘 헤르페스에 걸려 코 밑에 진물이 났다. 대신 성인이 된 후 한번씩 열 감기를 할 때는 정신을 놓고 기절할 정도로 감기를 앓았다.


내가 병적으로 우울하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대학생 때다. 그 때는 마음이 아플 때 허리가 고장 나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한 일이 생기거나 마음이 불편한 일이 생기면 온 몸이 긴장하면서 허리가 고장 났던 것 같다. 몸의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런 일은 살면서 계속 반복되었다. 이십  후반에 일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우울증이 깊어졌다. 밤마다 운전을 하면서 가드레일을 들이받지 않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고, 핸드폰을 꼭 쥔 채 운전을 했다. 그렇게 회사 생활을 하다가, 프리랜서와 석사를 진행하면서 성장을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함께 일하는 교수님의 비평을 견디며 5년을 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처음 공황이 왔다. 식사를 시작하고 15분 정도가 지나면 어지러움과 저림 증상이 나타나서 4시간 이상을 누워있어야 했다.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동네 가족 주치의에게 갔더니, 몸에는 이상이 없지만 증상이 있는 걸 전문용어로 자율신경계 장애라고 한다며 완벽주의를 내려놓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했다. 항우울제와 수면을 위한 신경안정제를 주셨다. 그러다가 이전부터 가끔 올라오던 두드러기와 가려움증이 더 심해졌고, 피부재생을 더디게 한다는 고기와 유제품을 끊었다. 교수님과의 일을 끊고, 제주도에서 한 달을 보낸 후 좀 있다가 취직을 했다. 신나서 일을 하다가 2-3년 쯤 지나서 손목을 끊임없이 그어대는 차가운 칼날 환촉각과 자살 충동으로 '이러다가 정말 죽겠다' 싶어 상담을 시작했다. 불면증을 달고 산지는 10여 년이 다 되어갈 즈음이었다. 마지막에는 거의 2~3일에 한 잤고, 그나마도 이어자기를 못 하고 있었다. 공황이 수시로 왔다. 숨을 못 쉬고, 토하고, 늘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맥박이 40대로 떨어지고, 혈압은 40-80 정도로 떨어져 회사에서 실려오거나 차에서 기절하듯이 누워있는 일이 반복되었다. 몸이 엄청 붓고,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아서 내가 봐도 괴물처럼 징그러웠다. 거의 악어 처럼 온 몸에 두드러기가 생겼다. 항히스타민제를 1년 간 복용했는데, 나중에는 복용 간격이 한 나절 밖에 못 버티는 상태가 되었고, 두피부터 발가락 끝까지 두드러기가 돋고 가려워서 약이 없으면 집에 가서 가져와야하는 지경이 되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나에게 몸이 안 좋아보인다고 했다. 보다못한 친구가 한의원을 하나 소개해줬고, 거기서 약을 지어먹고, 먹지 말라는 건 안 먹다 보니 거의 사찰 음식 수준으로 절식을 했다. 완벽하게 낫지는 않았지만 항히스타민제 없이 일상 생활을 견딜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가려우면 오일이나 보습제를 발라서 진정시키며 일상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상담을 한 1년~1년 반 정도 매주 90분씩 받았다. 운동도 1주일에 4~5일 하고, 마사지도 받고, 일기도 쓰고, 목욕도 하고, 여행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렇게 상태가 조금씩 좋아졌고, 컨디션이 제일 좋을 때 남편을 만나 나의 지병을 이야기하고 결혼을 했다. 남편은 내가 가장 좋은 상태에서 만나 가장 최악으로 치닫는 7년, 다시 상태가 나아지는 긴 여정을 함께 다. 이제는 나보다 나의 몸과 마음 상태를 더 잘 파악하는 사람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위험할 때 마다 몸은 항상 신호를 보냈다. 그럴 때 나는 나의 몸이, 나의 마음이 어떤 상황이나 사람들을 거부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그냥 어딘가 내 몸의 시스템, 면역이 고장난 거라고만 생각했다. 긴 투병 과정을 돌아볼 때, 몸은 항상 알고 있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나는 그 경고등을 무시하며, '옳다는 생각,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삶의 모습'을 따르기 위해서 마치 늪에 빠진 사람처럼 발버둥쳤고,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졌다.


결국 긴 투병 끝에 나는 몸의 말을 듣는 법을 배웠다. 아직 서툴지만, 이번 면접 불참 결정을 하면서 확실하게 알았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몸이 가장 나를 잘 알고 있다는 것. 몸이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상황이 내가 마음이 편안한 상황이라는 것. 아직도 가끔 토를 하고, 속이 불편하거나 졸린 것처럼 멍해지는 상황들이 있지만 그래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내가 들어야 하는 말은 나의 몸이 하는 말, 그리고 남편의 말.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 내가 들어야 하는 말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이상각 신부님 강론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기도를 하는 것 보다 하느님이 하는 말씀을 듣기위해서 침묵하는 순간이 중요하다는 말씀이 있었다. 침묵하는 순간에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고 그 시간이 더욱 중요하다고, 자신의 말을 하는 기도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침묵의 기도가 중요하다는 말이 무척 기억에 남았다.


듣는 귀와 듣는 마음을 가지는 것.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다.



작가의 이전글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아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