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엔 정답이 없다
그림을 그린 지 5년쯤 됐다. 그림을 그리고 홍대(동교동)에 산다고 했더니 동그래진 눈으로 "홍대(홍익대) 나오셨어요?" 묻던 사람도 있었다. 그건 아니지만 홍대를 나온 사람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대답했다. 나는 홍대 미대 출신이 아니라 홍대 앞 미술학원 출신이다.
일이 바쁠 때는 가끔 쉬기도 했지만 미술학원을 다닌 기간은 총 4년 정도 된다. 깊이는 달랐지만 대학 기간에 맞먹는 시간이었으니 이제는 곧잘 재료도 다루고 붓질에 머뭇거림도 덜하다. 그래서 지금은 나의 취미 생활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인근 지리를 잘 아는 사람들은 감이 오겠지만, 홍대와 합정에 집과 회사가 있었다. 그곳을 벗어나지 않아도 그럭저럭 주변에 즐길 거리가 많았기에 그 안에 갖춰진 것들을 충분히 누렸다. 그중 하나가 미술이다.
"홍대에 평생 살 것 같진 않아서... 그래서 나중에 혹시 후회할까 봐. 거기 살 때 그림을 배워둘 걸 하고..."
그런 이유로 그림(유화)을 시작했다. 물론 스트레스 해소 목적이 컸지만 미술학원을 흔하게 찾을 수 있다는 지리적 조건도 한 몫했다. 돌이켜보면, 참 잘한 선택이었다. 홍대를 떠날 줄, 이민을 오게 될 줄, 미술 단체에서 봉사를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많은 선생님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수업 때마다 두 분씩 계셨는데 주 2회를 다녔던 나는 총 네 분의 선생님을 거치게 됐다. 잘 맞는 분을 선택해 그 선생님 시간에만 가서 배울 수도 있었겠지만 내 (직장)일정도 바빠 그런 계산까지 할 여력은 못됐다. 페인팅 도구나 재료의 특성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정직한 방법으로,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보고 따라 할 뿐이었다.
유화는 마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여러 번 덧칠해가며 모양을 잡아가기 때문에 한 작품(캔버스)을 완성하는데 적어도 한 달 이상은 걸렸다. 그런 이유로 작품 하나를 놓고도 여러 사람의 지도와 손길이 더해졌다. 여기엔 문제점이 하나 있었는데... 지도받은 대로 물감을 묵직하게 올려 칠해놓으면 다음번 선생님이 나이프로 긁어낸다던지, 묘사를 해보래서 정성껏 모양을 잡아놓으면 다음번 선생님이 큰 브러쉬로 그 부분을 덮어버린다던지... 그런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지... 스케줄을 바꿔 한 선생님한테만 배워야 하나...' 순간순간 고민이 됐지만 그냥 그 방식을 지속했다. 다양한 스타일을 배워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그림은 수학처럼 공식이 없어서 좋았다.
배경부터 러프하게 채워가는 사람, 메인이 되는 피사체부터 형태를 잡아가는 사람. 순서도 스타일도 모두 다양했다. 그리는 모습에서 성격도 드러나 그런 부분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다. 만약 한 분에게서만 그림을 배웠다면 그 사람의 습관을 닮아갔거나 다양한 시도를 많이 못해봤을 거란 생각도 든다.
홍대를 떠날 때 그동안 쌓아왔던 캔버스들을 부모님 댁에 옮겨다 놨다. 부모님은 그림 멋지다며 결과물들을 보고 흐뭇해하셨는데, 나에게 있어 '과정물'인 그것은 하나의 결과값보다 더 많은 노력과 시간들을 상기시켰다.
결과는 하나지만 과정의 모습은 다양하다. 더 빠른 지름길이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더 맞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그림을 통해, 타인들의 방식을 통해 이런 단순한 진리를 배울 수 있어 좋았던, 홍대에서의 추억이 이렇게 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