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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 Jan 27. 2022

집필자 장애

슬럼프라서 더 힘을 낸다

"집필자장애(writer's block)를 겪는 건 자연스런 일이야. 그나저나 글 구토(vomiting writing)라니, 그 표현 참 재밌네."


얼마 전 지인에게 글 작업에 대한 슬럼프를 겪고 있다고 했더니 돌아온 말이다. 그 와중에 나의 문장에서 맘에 드는 표현을 짚어주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글을 토해내는 기계처럼 일했었다고 한 말이 재미있게 들렸던 모양이다. 어쨌든, 나의 고민에 공감하고 칭찬까지 덧붙이는 걸 보니 위로의 기술이 뛰어난 친구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슬럼프란 말에 Writer's block이란 단어로 즉각 맞받는 걸 보면 국적, 언어를 불문하고 모든 작가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란 것도 알게 해 준다.


2014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벌써 8년째이다. 그런데 지난 1년 간은--아니 사실은 그전부터 징조가 있었지만--심각한 글 막힘에 시달렸다. 첫 문장을 쓰는 게 힘들었고, 두어 문장쯤 가다가 전부를 지워버리는 것도 흔했다. 문장은커녕 단어 하나, 조사 하나에 심각한 내적 검열이 작동됐다. '이런 형편없는 글을 쓰고 있다니...' (지금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공간을 채워간다.)


첫 두 해 동안은 책을 출간했었다. 주로 에세이였고 여행에 대해, 삶에 대해, 다름에 대해서 쓰곤 했다. 매우 감상적이고 주관적인 글이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신문을 하게 됐는데 정치·사회, 그중에서도 주로 북한 이슈를 다뤘다. 나의 글은 이성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했다. 주필님께 받은 지적 중 가장 많은 부분이 "감정을 빼"라는 부분이었다. 더 나아가 편집을 맡게 되면서 타인의 글까지 교정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글은 점점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아오신)주필님을 닮아갔고, 그렇게 6년 가까이 신문에만 매달렸다. 


지난해 퇴사를 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오면서 이제는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쓸 수 있겠다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런데 캐나다에 온 후 알게 됐다. 글이 잘 안 써진다는 것을... 


편집자로 단련된 습관이었다. 수필을 쓰는데 기사처럼 써졌고, 칼럼이라도 써볼까 했더니 그것도 좀체 되질 않았다. 키보드 위에서 우왕좌왕했다. '다음'(Enter) 보다 '뒤로가기'(Backspace) 버튼을 누르는 횟수가 늘어났다. 일단 초안을 써놓고 수정은 나중에 해도 되는데--그걸 알면서도--한 글자 한 글자마다 편집자적 기질이 나타나 속도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거의 일 년 정도 글을 쉬었다. 어차피 이민을 와 환경도 바뀌었으니,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쁘다는 좋은 핑계가 있었다. 영어에 익숙해지려면 한국어는 잠시 놓아도 된다는 개인 합리화도 하면서...  


대신에 그림 그리는 작업을 계속했다. 오래된 취미인데, 다른 형태이지만 그렇게나마 창작 활동에서 멀어지는 건 막고 싶었나 보다. 몇 달 전부터는 예술 작업을 통해 정신 건강 회복을 돕는 비영리단체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우울증, 불안, 강박, 외상후스트레스(PTSD) 등 심리적 장애에 놓인 사람들인데, 생각해보니 이들을 돕겠다고 나선 나도 일종의 (집필자)장애에 시달리고 있으니 나부터 이 불안에서 벗어날 방법을 빨리 찾았으면 한다.


다 써진 글을 보면 쉬이 써진 것 같을까. 여전히 많은 문장들이 썩 맘에 들지 않지만 오늘도 그저 한 페이지를 채워본다. 스스로 슬럼프란 걸 알기에 더 힘을 내라고 다독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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