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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 Jan 25. 2022

워홀, 그 후 20년

당신의 선택은 옳다

이민자.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던 이 타이틀을 단 지 9개월여 시간이 흘렀다. 캐나다 캘거리에 이민 가방을 풀고 그동안 이민자들에게 제공되는 영어 수업을 듣거나 지역 커뮤니티 활동에 참여해왔다. 여전히 코로나 판데믹이 한창인지라 집과 학교 정도를 오가는 것 외에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 흘러갔다. 어쩌다 나는 이민자가 되었을까. 


작가로 살아왔더니 영주권이 쥐어졌고, 그 길로 회사를 그만두고 그렇게 애정하던 홍대 생활을 정리한 게 불과 일 년 전이다. 그리고 2021년 여의도에 벚꽃이 흩날리던 날, 그 봄바람에 실려 캐나다행 비행기에 올랐다.  


시작은 어디였을까. 이민자의 삶을 막연하게나마 바란 적은 있어도 이렇게 현실이 될 줄은 몰랐는데... 5년 전이었을까, 10년 전이었을까. 어쩌면 20년 전, 호주 워홀(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고 케언즈행 비행기에 오르던 날. 생애 처음으로 '해외에서 살아보면 어떨까'란 작은 호기심을 품었던 그날이 시작이었을까.


며칠 전 뉴스에서 호주가 인력난 해소를 위해 워홀 비자 신청비를 면제해주기로 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 신청비가 무려 40만 원(AUD 495)을 넘긴다는 것도 알게 됐다. 툭하면 "마음은 아직 이십 대"라며 모든 일을 엊그제 일처럼 말하는 라떼(나 때) 세대가 됐음을 일단 인정하고... 라떼는 비자 신청비가 10만 원 정도였으니 이 대목에서조차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제는 하도 그 숫자가 많아져 유튜브에 '워홀' 두 글자만 쳐 봐도 세상 곳곳에 퍼져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쉬이 볼 수 있다. 단연코 호주를 배경으로 한 영상들이 가장 많은데, 워홀 비자가 체결된 지 가장 오래됐고 인원 제한이 없는 국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1995년 한국-호주 간 첫 번째 워홀 비자 프로그램이 체결됐다. 내가 비자를 받던 2001년을 기준으로 보면, 나는 대개 90년대 후반에 호주를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얻어 비자를 준비한 경우이다. 신청서는 수기로 작성을 해야 했고, 에세이(여행 계획서)도 꼼꼼히 써야 했으며 사본이 아닌 실물 여권을 직접 대사관에 제출한 후 꼬박 6주를 기다려야 했다. 지금의 워홀러들이 들으면 많이 불편했을 시대의 이야기 같겠지만, 라떼도 인터넷이란 게 있어서 정보 교류는 (한두 곳 정도에 불과하지만)온라인카페를 통해 그나마 할 수 있었다. 90년대의 워홀러들은 어떻게 정보를 얻고 준비했을지 나도 무척 궁금하다. 더욱이 선례도 없는 그 길에 오를 용기를 냈다는 점에서, 진정한 개척자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정보가 얼마나 많고 적든, 선례가 있고 없든 내가 처음이라면 그 길은 쉽지 않다. 그래서 생애 처음 1년이란 시간을 독립해서 지내 본 나의 호주 워홀은 말 그대로 '아프니까 청춘'이었다. (그렇게 그 시간을 위로하고 정의한다.)


정말로 아팠다. 몸도 마음도 편치 않은, 만 스물에 떠난 워홀이었다. 하물며 내 땅에서도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됐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혹독한 성인식을 치른 거나 다름없었다. 비자를 쥐었을 때의 의기양양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집 텃밭에서 상추 한번 안 뽑아 본 내가 척박한 호주 땅 어딘가에 떨어져 과일을 온종일 따다가 허리가 부러질 듯 아팠고, 어렵게 모은 돈이 아까워 여행도 시원하게 다녀오질 못했다. 생활이 궁핍하다 보니 어학보단 일에 집중했다.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이 2002년 월드컵 열기에 휩쓸려 환희를 느낄 때 월드컵에 출전조차 하지 않는 나라에서 말없이 포도를 따고 오렌지 나무에 올랐다. 


호주를 다녀온 직후에도 이런 삶이라면 경험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나의 조국만 한 곳은 없다고... 그런데 상처가 아물면 아픔이 잊힌다고 했던가. (여성이 계속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하는 이도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픈 기억은 사라지고 좋았던 순간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탁 트인 대지가 좋았고, 파란 하늘 위 뭉게구름이 좋았고, 신상을 캐묻지 않는 적당한 관계가 좋았고, 할머니-할아버지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그 허물없음이 좋았다. 그저 그 해는 좀 더 넓은 자유와 좀 더 무거운 책임이 있었을 뿐이다.


갓 스물의 그 어리숙함을 만회하고 싶었을까. 나는 그 경험을 조금씩 더 다듬어 서른 즈음엔 캐나다로 한번 더 워홀을 떠났고, 마흔 즈음엔 캐나다 영주권을 얻었다. 그래서 20년 만에야 그날을 새롭게 회상한다. 실패가 아니었다고.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았다고.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옳다고 보는 편이 좋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다면, 옳다는 믿음 아래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이브, 가까운 이웃집엘 방문했다. 캘거리에 도착한 후 첫 두어 달 정도를 머물렀던 집의 가족들이다. 서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그들은 내게 작은 선물상자와 더불어 시 한 편을 읊어주었다. 나를 보니 떠오르는 시가 있다면서... 


Robert Frost의 'The Road Not Taken' (가지 않은 길) 이란 오래된 영시다. 요약하면 이러하다. 숲 속을 걷다 마주친 두 갈래 길. 어차피 동시에 걷지 못하니 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계속 걷다 보면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언제나 (가지 않았던)다른 길에 대한 미련이 남기 마련이지만, 지금 걷는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맞게 되고 그로 인해 변화하게 된다.


시를 빌어 나를 격려해 준 그들의 마음에 감사와 온기를 느낀다. 그리고 오늘도 어디선가 (혹여)후회나 한탄을 하고 있을 젊은 워홀러들이 있다면, 이 시를 함께 읊조리고 싶다. 


"당신이 선택한 그 길이 많은 것을 가져다줄 것이다. 당신의 선택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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