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제목이 좋다. 편지엔 늘 사연이 있는 거니까. 책장을 열고 서너 페이지 읽다가 이내 덮었다. 창고랑 분리수거 통을 뒤적거렸으나 없다. 분리수거 귀찮다고 신문을 끊었더니 이럴 때는 아쉽다. 지난번에 아크릴 작업할 때 썼던 종이 빠레트가 보인다. 아쉬운 대로 그걸로 책보를 싸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조금 더운 봄의 막바지에 골드미스 후배와 인사동을 유유자적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에 최고라며 책 자랑을 한다. 그래서 그 작가의 책을 모두 사서 읽었단다. 나는 궁금하다. 그녀는 어느 코드에서 그 작가의 글을 좋아하게 된 걸까. 후배는 웬만해서 책을 빌려 주지 않는 데 나에게 특별히 인심을 쓰는 거라고 강조하며 책을 내밀었다.
서너 페이지를 읽는데 책장이 잘 안 넘어 가고 다시 덮인다. 나는 첫 장부터 페이지 사이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닫히지 않게 했을 텐데... 책 표지를 보니 겉표지와 표지를 한 번 더 감싸는 띠 표지까지 그대로다. 그녀가 책을 대하는 자세가 전달된다. 겉표지를 벗겨서 선반위에 두고 종이 빠레트로 책 껍질을 새로 만들었다. 그녀의 애정을 유지하고 싶었다. 종이표지가 허름하고 물감자국이 멋 대로다. 내 책 같다. 이제 좀 막대해도 될 거 같다.
‘사서함110호...’는 달달한 연애소설이다. 주인공 진솔은 라디오 방송 작가다. 그녀는 다른 여자를 10년 동안 가슴에 품고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썸타고 있다. 서른세 살 서른한 살의 남녀는 같은 직장에서 가벼운 손동작 하나에도, 언 듯 스치는 눈빛에서도 썸이 계속된다. 달달하지 않을 수 없다. 연애소설은 참 오랜만이다. 후배의 최애소설이 무겁지 않다는 게 다행스럽다. 책은 100 여 쪽을 읽었음에도 90도 정도도 안 열린다. 각도를 유지하려면 두 손으로 잡고 읽어야 한다.
드라마와 달리 소설은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다른 주인공을 내세우는 나를 발견했다. “남자 주인공은 누구로 하지? 다정하고 냉정하고 능력 있는 남자배우가 누가 있더라? 진솔은 드라마 ‘또 오해영’에 나온 서현진이 좋을 거 같아. 김하늘로 할까?” 어이없다. 이런 연애 기회를 남한테 주려하다니 no good이다.
‘나 당신 사랑해요’ 진솔은 다른 여자를 잊지 못하는 그에게 말해버린다. 소설에 나를 대입할 수 없는 이유는 청춘이 저만치 가버려서다. 또 하나는 진솔의 이런 솔직함과 대담성이 나에게 없기 때문이다. “자존심 상하게 그런 말을 해버리다니... 아니야 차라리 잘했다. 맘고생은 짧을수록 좋지.” 그녀와 내가 일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녀의 독백이나 단골로 가는 주점 벽에 쓰인 낙서들은 내 맘을 움직인다.
- 연탄재 함부로 걷어차지 마라. 너는 언제 열렬히 태워서 재가 된 적이 있느냐 -
벽의 낙서를 보고 진솔은 웃었다. 나는 한숨이 난다. “그래. 태워본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그 시절에는 하나의 사랑을 강요했고 드러내지 않는 게 미덕이었다고 치자. 그래도 태워 본 적 없으니 아직 재가 되지 않은 거 아니냐?” 나는 애꿎은 낙서에게 반문했다.
책의 중간쯤에서 각도가 150도 정도로 펼쳐졌다. 한 손으로 가볍게 잡아도 된다. 후배는 전화가 왔거나 택배가 와서 무거운 거로 잠간 눌러 놓고 얼른 받으러 나갔다 왔을지 모른다. 진솔의 고백이 있는 그쯤이다. 책을 덮을 틈이 없었겠지. 큭 웃음이 났다. 나도 점점 그들의 연애가 궁금해지는 참이다.
진솔은 아직도 다른 여자에게 머무르는 남자의 마음을 눈치 채고, 아니 넘겨짚고 멀어지기로 결심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경기도 어디쯤으로 이사를 간다. 서현진 같은 대타가 필요 없어진다. 나도 그녀와 같은 결정을 했을 테니까. 요즘은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고 떠들고 솔직함이 미덕이라고 강조해도 다른 사람한테 가 있는 마음 가져오기는 힘든 일이다.
-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
작가의 한 줄은 참 위대하다. 가끔 보이지 않게 독자의 몫을 챙겨놓기도 한다. ‘너는 계속 그녀를 사랑하기를, 나는 계속 너를 사랑할 거니까’ 진솔의 마음이 그런 걸로 보인다. 하지만 ‘너 아직 나 좋아하는 거니 나는 니 생각만 하는데’ 이렇게 들리기도 한다. 답은 각도에 따라 다르겠다. 잔으로 보이기도 하고 마주보는 두 얼굴로 보이기도 하는 루빈의 잔처럼.
진솔은 포기도 아니고 기다림도 아닌 시간을 보낸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려간 시골의 삶은 그녀에게 휴식이 되고, 한가로움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날이 궂다고 늘 나쁜 일만 생기는 거는 아니다.
- 생각날 때마다 마셨더니 이젠 마실 때마다 생각나네 시팔-
주점 벽의 낙서가 솔직하다. 네 생각을 지우려 술을 마셨더니 술 땜에 생각난다고 욕을 한다. 생각을 불러오려고 술을 찾은 걸 텐데. .. 삼십 촉 백열등에 그네를 타는 목로주점 흙바람 벽에는 그림움과 미련의 낙서들로 가득하다.
소설은 해피앤딩이다. 남자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로 한다. 10년의 사랑을 끝내고 다시 한 번 사랑을 시작하기로 한다. 하지만 진솔은 망설인다. 복잡한 심정은 다가오는 사람을 자꾸 밀어내려고 한다.
- 날 사랑하는 게 그렇게도 힘들면 사랑하지 않아도 돼요. 대신 도망치지만 마요. 내 인생에서.-
그 남자가 진솔에게 한 말이다. 사랑은 가끔 역전되기도 한다. 작가는 과장되지 않지만 가슴 아리는 언어로 모태솔로도 연애 하고 싶은 마음을 만들어 낸다.
술은 수면제보다 신속하게 잠을 불러오지만 술 깨면서 잠이 깨버리는 약점이 있다.
어제밤 술이 넘쳤는지 모자랐는지 새벽에 잠이 깨버렸다. 3시도 안됐다. 평소 같으면 휴대폰 게임을 했거나 카톡 되씹기를 했을 거다. 그래도 잠이 안 오면 삭제하기를 망설이던 문자나 전번을 지워버렸을 시간. 책을 펼쳤다. 3분의 1쯤이 남았는데 펼쳐지는 각도는 다시 좁아졌다. 침대 머리에 기대서 두 손으로 잡았다. 책을 한 번도 누를ㄴ 흔적이 없다. 어쩌면 그녀는 한달음에 책을 읽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한 번 살아 볼걸 그랬어..허허허 -
진솔은 그 남자의 집에 방문했다가 할아버지의 스크랩북에서 여자사진을 발견한다. 앨범에 꽂혀있지 않은 걸로 부인이 아님을 짐작한다. 할머니를 먼저 보낸 팔순의 할아버지는 허허 웃는다. 할아버지만 아는 스크랩북 속에서 영원히 간직되는 여자.
새벽6시가 넘었다. 작가의 에필로그까지 읽고 책을 덮었다. 진작에 해가 떴다. 여름 해는 등장을 서두르는 편이다. 책은 끝까지 달달하다. 모질지 않아서 감사하다. 작가의 당부처럼 가볍게 읽었다. 이도우라는 작가는 50초반의 나이에 다시 연애소설을 출간했다. 그것도 순수하고 편안한 연애소설일 거라고 짐작이 된다. 문득 이도우 작가가 본인의 세대에 맞는 소설을 쓰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불륜이든 로맨스든 아니면 회상이라도 이작가는 순하고 연하게 50대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거 같다.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말한다. 다시 사랑을 시작하라고. 지금 다시 사랑을 시작하라고.
책을 덮었다가 다시 앞의 몇 장을 읽었다. 진솔이 낯익다. 그리고 후루룩 넘겼다. 지나치려던 글귀 하나가 다시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