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탄, 복수를 장전하다

<2025년 4월 4일 저녁 · 대전병원 특실>

by 부지깽이

무지개를 저주한 박규가 53년 전 전쟁터로 떨어져 자신의 인생을 짓밟은 악마를 다시 만나 정해진 운명을 바꾸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시간의 한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 * *


내 이름은 력이다. 성은 박.

아빠가 세상을 박력 있게 살라고, 돌림자 무시하고, 주변 잔소리 흘려듣고 박력 있게 밀어붙여 지어주신 이름이다.

한자는 당연히 힘 력(力)자를 쓴다.


쌍둥이 여동생 이름은 윤이다.

한자는 ‘햇빛 윤(昀)’.

햇빛처럼 빛나고 따뜻하게 살라고 지어주셨다.


윤이는 사격선수다.

어릴 때 탄 형에게 배운 사격 실력을 살리겠다고 사격부가 있는 도마중학교에 진학하더니 코치님이 한 번 쏴 보라고 건넨 총을 첫 발부터 과녁에 명중시키는 장난(?)을 쳤다.

중학교 내내 각종 대회에서 메달을 휩쓸더니 울산여상으로 스카우트됐다.

청소년 대표-국가대표를 거쳐 아시안게임 금메달, 올림픽 은메달을 따고 은퇴해 진천 선수촌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나와 윤이는 입양아다.

오십 줄 바라보는 부모가 “벌써 노망이 들었나?”는 집안의 반대와 주변의 핀잔을 흘려듣고 정기 후원하시던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우릴 데려와 다음날 바로 호적에 올렸다고 한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윤이는 생모가 보호시설에서 퇴소하자 며칠 낮밤을 쉬지도 않고 울었다고 한다.

아빠 엄마 품에 안겨서도 울고 또 울었다고···.


나는?

“조금만 울고, 분유만 잘도 먹었지~”

엄마는 그렇게 웃으며 말했지만—그 말끝엔 서늘한 무언가가 스며 있었다.

돌이켜 보면, 아마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윤이는 자라서 술에 취하기만 하면 “낳아준 엄마 보고 싶다”며 울었고, 나는··· 울지 않았다.


그리고. 내겐 형이 한 ‘분’ 있다.

‘분’이라고 한 건 형과 내 나이가 27살이나 차이나기 때문이다.

날카롭게 생긴 것과 달리 다정다감해서 서너 살 터울 형제처럼 장난치며 지낸다.

형은 베트남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자라고, 네팔에서 온 라이따이한이다.

이름은 탄, 탄환 탄(彈)자를 쓴다.

풀네임은 팜 녓 탄(Phạm Nhật Tân).

‘햇살 아래 새롭게 태어난 아이’란 뜻이라고 한다.

혹은 ‘시대를 관통하는 탄환’의 뜻이라고도 하고···.


한 번 마음먹은 건 죽었다 깨도 하고야 마는 쇠심줄 삶아 먹은 똥고집 아빠가 조부모의 ‘너죽고 나죽자’ 반대를 물리치고 당당히 우리집 호적에 올렸다.

엄마는 처음부터 반대하지 않으셨다 한다.


탄 형은 우리 가게 2층에 무술도장을 차려 동네 꼬맹이들을 가르친다.

탄 형의 수제자는 나고, 애제자는 윤이다.

내가 군대를 해병대에 자원해 간 것과, 윤이 사격선수가 된 것도 어릴 적 탄 형에게 배운 호신술과 사격술이 재미있어서였을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우리 동네는 북한에서 레이다에 탐지가 안 된다며 한국전쟁이 끝난 후 30년 동안 미군부대가 주둔해 있었고, 미군이 떠난 후에는 육군 탄약사령부가 주둔해 있다.

사령부 참모장은 계급이 대령이었는데, 가끔 양주 한 병을 들고 아빠를 찾아와 술잔을 기울이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참모장이 처음 아빠를 찾아온 얼마 후 탄 형은 일주일에 한 번 부대에 들어가서 간부와 사병들을 대상으로 특공무술을 가르쳤다.

탄 형은 그 때마다 나와 윤이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무술 수업이 끝난 후, 참모장의 배려로 어린 제자들에게 부내 내 실내사격장에서 총 쏘는 법을 가르쳐 줬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가족 구성이다.

그리고 아빠와 탄 형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트라우마가 있다.

그건 바로 ‘무지개’다.

아빠와 탄 형의 인생을 짓밟은 게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추앙하는 무지개라니···.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넋두리였는데···.

덤프트럭에 받히는 순간에 내 눈에 박힌 무지개가 떠올랐다.

사고 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눈을 떴을 때—나는 병원이었다.


낯선 천장, 끈적이는 붕대, 삑삑대는 기계음···.

그리고 내 곁엔··· 아빠가 누워 있었다.

입엔 인공호흡기 튜브가 꽂혀 있었고, 코엔 가느다란 산소 튜브가 꽂혀 있었다.

팔엔 주삿바늘이 여러 개 꽂혀 있었고, 심장 모니터는 규칙적으로 ‘삐—’ 소리를 냈다.

의식은 몽롱했고, 감각은 떠다녔다.


그 와중에도 윤과 엄마의 흐느낌, 탄 형의 굳게 쥔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주 잠깐,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가—다시 눈을 떴을 땐, 탄 형이 병실을 나가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본 순간,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왠지 모를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탄 형이 마치 가족들을 버리고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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