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인격이다?
영업 사원은 팔기만 하면 땡인가
얼마 전에 한 고객사의 자회사 직원들과 함께 회식을 했다. 고객사에서 프로젝트를 하나 했는데, 그 프로젝트 규모가 꽤 크다 보니 프로젝트 관리를 자회사에서 맡게 되었다. 우리는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 자회사 직원들과 꽤나 친해졌다. 게다가 그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된 덕분에 기쁜 마음으로 회식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 회식 자리에서 자회사 직원들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회사의 영업 담당자 때문에 자기들이 할 일이 갑자기 많아졌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고객사에서 이 자회사에 일을 빡세게 시키는 편이라 이들은 일이 많아지는 것에 대해서 걱정이 많았다.
무슨 일인고 하니, 그 회사의 영업 사원이 고객사에 제품을 밀어내기 위해서 이것저것 다 해주겠다고 듣기 좋은 말을 잔뜩 했다고 했다. 그가 말한 '이것저것'에는 제품을 사용하는 데에 필요한 몇 가지 기술적인 작업들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작업은 할 수 없다고 기술 검토가 이미 끝나 있었고, 자회사 직원들은 앞으로 그 작업을 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다. 반면 고객사에서는 그 작업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적잖이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영업 사원이 다 할 수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말했을 때 반가워하며 자회사에 그 작업에 대해 다시 검토해 보라고 요청한 것이다.
영업 사원이 되고 나서, '숫자가 중요하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심지어는 '숫자가 인격이다'라는 말까지도 들었다. 그 말을 한 사람들은, 영업 사원은 실적을 얼마나 많이 내느냐에 따라 평가받는다는 뜻이라고 했다. 실제로 세상의 많은 영업 사원들은 달마다, 분기마다, 해마다 채워야 할 실적 목표를 받는다. 그 목표를 이루면 그만큼 높은 인센티브를 받겠지만, 목표를 못 이루면 차가운 대접을 받는다. 실적을 빡빡하게 관리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영업 사원들은 실적을 높이기 위해 종종 무리해서 제품을 고객사에 밀어내기도 한다. 아마 앞서 말한 영업 사원에게도 그런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실적에 쫓겨 무리하게 제품을 밀어내다가 문제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영업 사원 입장에서야 일단 실적이 생겼으니 잘 된 일이다. 하지만 회사가 그 거래를 통해 이득을 보지 못한다면, 영업 사원이 열심히 일한 보람이 없을 것이다. 제품을 밀어내기 위해 함부로 뱉은 말들을 뒤처리 하느라 자원이 더 많이 들어간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손해가 되니 말이다. 그러니 영업 사원의 인격을 '숫자'로 판단한다면, 그것은 영업 사원 한 사람의 실적만이 아니라 회사 전체의 손익을 토대로 판단한다는 뜻이 아닐까. 최악의 경우에, 영업 사원이 자기 실적 때문에 무리했다가 고객이 회사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면 그것만큼 큰 손해가 또 있을까.
그래서 영업 일을 하면 할수록 중심을 잡기 어려운 것 같다. 당장 실적을 채우려면 어떻게든 제품을 팔아야 한다. 하지만 무턱대고 제품을 팔았다가 뒤처리 때문에 고생하면 안 되니까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너무 신중해지면 영업 사원이 숫자가 이렇게 없으면 어떡하냐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런 면 때문에 한 선배님께 영업 일이 내 적성에 맞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그분은 '숫자가 적성이다'라는 대답을 해주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영업을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실적을 낼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으면 된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 나만의 방법을 얼른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