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구름에 비가 들어 있을지 모른다
하마터면 큰 기회를 놓칠 뻔한 이야기
얼마 전에 회사로 전화가 한 통 결려왔다. 팀 동료가 전화를 받더니 나에게 넘겨주었다. '오징쌤, ㅁㅁ고객사 분이신데, 오징쌤이 여기 담당이시니까 전화 한 번 받아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언제나처럼 이 날도 전화비가 쏟아져 내렸지만, 회사 전화기를 드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는 썩 좋은 느낌이 나지는 않았다. 투박한 사투리에 어눌한 말투로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고객이 전화를 건 용건도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 고객이 속한 부서에서는 이미 우리 제품을 구매해서 쓰고 있었다. 최근에 그 고객도 우리 제품을 쓸 일이 생겨서 우리 제품을 관리하는 담당자에게 혹시 자신도 쓸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담당자는 우리 제품이 필요한 사람들 수를 조사해서 제품 구독 기간을 연장할 때 한꺼번에 살 생각이라고 했다. 그 고객은 자신의 부서에서 우리 제품을 추가로 살 때까지 체험판으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 부서에서 구독을 연장해야 하는 날짜는 5월 말이다. 그러니 그 고객은 지금으로부터 세 달 동안 우리 제품을 무료로 쓰게 해 달라는 말이었다. 세 달이면 1년의 1/4이니, 말하자면 1년 구독료의 25%를 할인해 주는 것이 된다. '역시나 내 첫 느낌이 틀리지 않았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요즘 제조사에서 그 정도로 길게 체험판을 안 주는 것 같다'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랬다가는 그 부서에서 나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가 돌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 부서에서 우리 제품을 꽤 많이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단 체험판을 왜 그렇게 길게 쓰려고 하는지 물었다. 그 고객은 올해 데이터 쪽 교육 담당자가 되었는데, 그 교육 커리큘럼에 우리 제품 교육도 함께 넣을 생각이라고 했다. 여기서 대충 하면 안 되겠다는 느낌이 왔다 그래서 한층 정중하게 이렇게 말했다.
"제조사 정책은 요즘 점점 체험판을 안 주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상황이나 맥락을 조금 더 설명해 주시면 제가 제조사에 체험판을 요청하기 조금 더 편할 것 같습니다. 교육 담당자라고 하시면 저희가 올 한 해 신경을 많이 써드려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고객님 부서에서 저희 제품을 관리하시는 분과도 저희가 자주 연락하고 만나고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교육을 어떻게 할 계획이신지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앞으로 업무를 도와드리기 좀 더 편할 것 같습니다."
그 고객은 먼저 한 발 다가가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마음의 문을 열고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제품을 무료로 쓰게 해 달라는 게 미안해서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제대로 못 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올해 교육 대상자가 100명 가까이 된다고 했다. 일단 교육용으로 우리 제품을 20개 정도 사서 교육을 한 다음, 교육이 끝나고 실제 업무에 우리 제품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 앞으로도 우리 제품을 추가로 살 계획도 있다고 했다.
별 기대 안 하고 몇 마디 물었을 뿐인데, 알고 보니 큰 거래로 이어질 수 있는 기회였다. 내가 알기로 이 부서는 그동안 직원들이 직접 코딩해서 데이터를 정리하고 분석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데이터를 많이 다루는 것에 비해 우리 제품은 덜 쓰는 편이었다. 그런데 나와 통화한 고객이 교육을 잘하면 우리 제품을 쓰는 사람 수가 많이 늘어날지도 모르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이 고객에게 3개월 체험판 주는 게 아깝거나 귀찮아서 전화를 대충 끊어버렸다면 이 모든 정보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영업 오래 하신 분들은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모른다'라는 말을 종종 한다. 그동안은 이게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언제든 성실하게 일하라는 뜻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이 말의 뜻을 조금은 더 알아먹은 것 같다. 지나가는 구름인 줄 알고 그냥 흘려보냈다면 큰 비를 맞을 기회를 놓쳐버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이제는 이 구름에서 제때 비가 내리도록 잘 관리하는 일만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