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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대면 '익명' 사회, 아파트식 법치주의 공화국

CH III 공동주택의 ‘삼권분립’을 해치는 7가지 '아파트' 문화

by 관계학 서설 II

입주자대표회의(이하 '입대의'라 한다)는 입주민 중에서 선출된 동대표로 구성된다. 임기는 2년이고 연임이 가능하다. 동대표 중에서 회장, 감사, 이사 등 임원을 직, 간접선거를 통해 선출한다. 공동체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사안을 논의하고 의결하는 회의이자 상설 대표기구이다. 회의에서는 일반적으로 연간 예산, 시설 유지 관리, 보안 및 커뮤니티 규칙 제정 등과 같은 이슈들을 다룬다. 동대표는 관리주체와 입주민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여 투명한 의사소통과 공정한 의사결정을 보장하고 책임진다. 목표는 모든 주민의 복지를 증진하는 동시에 협력을 촉진하고 갈등과 분쟁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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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거미줄에 갇혀 '자기 영역' 방어위주로만 움직인다

공동주택에서의 인간관계는 온라인이라는 거미줄에 갇혀 있으며, 매우 배타적인 ‘자기 영역’ 보호 중심주의 성향을 기본적인 특징으로 한다. 세대 내 '가족' 구성원을 중심으로 단지 내 일상생활이 대부분 유지된다. 외부 관계는 인터넷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년에 기껏해야 한두 번 정도 관리사무소에 핸드폰으로 연락하여 의문사항에 대해 질의하고 관련 민원을 제기할 뿐이다. 동별 게시판이나 단지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수많은 공지사항은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 확인 말고는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 꼼꼼히 읽어보지도 않는다. 대부분은 공지사항이 어디에 게시되어 있는지조차 모르고 관심도 없다. 매월 관리비 명세서가 발행되어 동별, 세대별로 배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주민이 얼마나 될까? 늘 단지 내에 돌아다니는 광고물 선전지정도로 생각한다. 힐끗 한번 쳐다만 볼뿐, 관리비는 매월 은행계좌를 통해 자동이체되면 그뿐이다. 우리 동의 대표가 누구인지 입주자대표회의의 회의록은 나에게만은 과다 정보에 불과하다.


물론 입주민도 가끔 궁금한 점이나 의문사항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쁜 생업으로 이것저것 챙기다 보면 금세 잊어버리기 일쑤이다. 더 나아가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귀찮은 논쟁거리로 치부해 버리기 일쑤이다. '난방비, 경비비 등 관리비 부과 기준에 대해 관리사무소에 가서 의문사항을 물어보라고' 서로 미루다 보면 부부간의 언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때뿐이다. 전체 입주민의 90%가 아파트 단지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하다. 10% 정도는 관심은 분명히 있으나, 일단 문제 제기부터 먼저 하고 원인, 결과 등 상황을 따지기보다는 이에 대해 무조건적인 비판성 발언으로 이어간다. 즉각적으로 실행이 가능한 해결점을 찾는 노력은 나의 일이 아니고 남의 영역으로 분류해 버린다. 전체의 1%는 비판을 넘어 '양보와 배려'가 없는 일방적인 자기주장으로 일관한다. 설득이란 과정과 절차는 아예 무시되고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기본 룰은 처음부터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온라인 주민방은 익명(匿名)으로 운영되다 보니 이 같은 현상을 더욱 부추기고 정도를 심화시키곤 한다.


아파트 단지는 거대한 비대면 익명사회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입장, 상황에 대한 사전 이해와 고려는 전혀 없이 무조건 비판부터 하고 자기주장을 강요하는 '배타적인' 소통 문화를 가지고 있다. 민원이나 이슈의 근원을 찾기보다는 일단은 자기와 다른 의견과 주장을 하는 상대는 의심부터 하고 신뢰하지 않는다. 심하면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 또는 흑색선전으로 만들어진 '~카더라' 방송을 활용하여 일단 상대방에 대해 '편견의 인식 틀(Setting a framing)‘을 덮어 씌운다. 그러고 나서는 다수의 군중 심리로 여론몰이를 하여 상대방을 벼랑으로 밀어붙인다. 나중에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더라도 '아니면 말고!'로 치부해 버리고 이에 대해 정정이나 사과자체를 고려하지도 않는다. 시간이 지난 다음 비록 사실이 확인인 된다고 하더라도 이 역시 또다시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부정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이에 대해 문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절대다수에게는 이미 다 지나가고 잊혀 버린 일이기 때문이다. 사안의 원인을 찾기도 어렵고 그 결과는 더욱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이런 황당한 일을 몇 번 경험하고 나면 10명 중 9명은 '뭐가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말을 합리화 삼아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바로 그 점을 소수들은 노리고 있다. '물러서지 않으면 이긴다'는 아파트의 불문율이야말로 목소리 큰 일부 주민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이다.


정보와 논리의 평준화로 모두가 판검사이고 자기 변론까지

몇 동 몇 호에 살고, 누구인지도 서로 모르는 사회에서 공동의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까? 공동주택은 표면적으로는 평균 100개 이상이나 되는 규약의 조항과 이를 좀 더 세부적으로 풀어놓은 서너 개의 규정집을 근거로 운영되고 관리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표면적으로는 '아파트식 법치주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동주택 규정과 규약의 실질적인 운영방식은 요즘 탄핵 세태와 관련하여 김후곤변호사가 한 언론사 기고문에서 명쾌하게 일침*을 가한 그런 부정적인 방식대로 돌아간다. 즉 규정과 규약이 정한 내용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유권 해석하거나 더 나아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탄력적으로 개정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오래전 구습이 되살아난 느낌마저 든다. 다수 입주민의 무관심과 일부 '자기주장' 세력이 적절히 뒤엉켜 공동주택의 '헌법과 법률' 제도와 시스템은 점점 화석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니 적폐 청산이란 고질적인 병폐를 뿌리 뽑고 새로운 변혁에 시동을 걸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손해를 감내하고서라도 이를 돌파해 보려는 동대표와 입대의 임원진이 있겠는가? 규정과 규약의 하방지향적 나선형 구조로 빠져들다 보면 점점 나아지기보다는 핵심 쟁점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공동주택에는 이를 단칼에 끊어버릴 법률의 마지막 보루인 헌법 재판관은 물론이고 헌법재판소도 없지 않은가?


아파트식 법치주의를 더 병들게 하는 요소는 '정보와 논리'의 평준화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입주민이나 이를 설명하고 대응하는 관리주체, 동대표 그리고 입대의 임원들 모두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을 적절히 활용하여 관련 정보와 논리를 얼마든지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갖출 수 있다. 더구나 쟁점의 토론과 논쟁이 온라인상으로 이루어진다면 비대면 익명성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 중간중간 상대방의 공격에 말문이 막히더라도, 관련 정보와 논리에 대한 실시간 검색을 통해 빠른 시간 내에 즉각 논리적인 반격으로 상황 전환을 시도할 수도 있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결정적인 '말과 글' 실수만 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만회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본인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설혹 실수해서 패 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전체 리셋이 가능한 온라인 배틀이다. 토론과 논쟁의 당사자는 물론이고 청중도 온라인상에서는 아파트 법정의 검사이고 변호사이면서 판사이다. 온라인 주민방에서 제기된 민원들 중에서 '합일점'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이를 충분히 반증한다. 공동주택 재판에는 항고, 상고 절차도 없지 않은가? 군법회의처럼 단심이기는 하지만 판결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년 입대의 회장 직무대행(이하 직대라 한다) 선임을 위한 회의가 있었다. 우리 단지는 입대의 이사진만 회장 직대의 후보자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사진에서 후보가 없는 경우 일반 동대표 연장자순으로를 선임할 수 있다는 조항은 서울시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에만 존재한다. 이번은 우리 단지의 규약 개정이 5년이나 계속해서 미루어지는 바람에 회장 직대 선임과 관련된 단지 규정 내용이 최신판으로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여하튼 관리소장이 주도하여 규정 내용에 정해져 있지 않은 일반 동대표를 회장 직대로 선임했다. 문제제기를 했지만 '그들은' 원치 않는 이사와 연장자인 일반동대표 후보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규정에도 없는 선임 절차'이기는 하지만 '하자'는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했다. 임원 선거는 선거관리위회(이하 선관위라 한다)에서 실시해야 하는데 왜 선관위에서 주관하지 않았느냐고 또 다른 문제제기를 하자, '회장 직대는 임원이 아니라서 선관위가 선임절차에 관여하지 않는다'라는 기기묘묘한 유권해석을 내놓았다. 단지의 규약과 규정은 서울시 관리준칙을 기준으로 개정을 하지만, 현재는 개정이 되지 않은 사항이기 때문에 적용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규정에도 없는 일반 동대표를 회장 직대로 선임한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 긴급, 비상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주장한다. 입대의 회장 직대는 일반 동대표 중 연장자순으로 선임한다는 조항은 규정에 없어서 적용할 수 없는데, 규정에 없는 일반 동대표의 회장 직대 선임은 긴급, 비상 상황이라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뭔 말인지?


선진 시민 의식을 공동체 사회에도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

이 같은 사례들은 공동주택 내에는 조금만 살펴보면 너무나 많다. 모두 다 *"법을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거나 탄압하는 데 사용하거나, 권력자들의 부정부패를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거나,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자들은 모두 ‘법치주의의 적’들이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바로 이런 언행과 행태가 아파트식 법치주의의 실행 과정이고 절차이며 그 결과이다. 겉으로는 규약과 규정을 들먹이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속셈'이 숨겨져 있다.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실수와 과오를 덮어버리는 수단으로 활용을 하고 있다. 공동주택의 입법기관이며 의결기구인 입대의는 규약으로 정해진 구성원의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모든 사안을 의결한다. 구성원인 동대표가 의결 정족수만큼 선출되지 않으면 입대의는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동대표 선출과 선거도 규약과 규정에 따른다.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동대표 선출을 연기할 수도 있다. 입대의 구성은 구청에 신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 승인 요건중 가장 중요한 사항은 첫째는 입주민의 직접 선거를 통한 입대의 회장 선출이고 두 번째는 동대표를 의결 정족수만큼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결을 할 수 없는 입대의는 선관위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회장 선거를 실시하지 않으면 입대의 구성 신고도 못하고 한동안 정기 또는 임시회의도 열지 못한 채 기능과 역할자체가 완전히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사안 발의를 위해 전 입주민 의견청취 전자투표를 실시해야 하고, 동의를 받아 발의되면 이번에는 승인을 위해 또다시 주민 투표를 선관위에 요청해야 한다. 아무리 빨리 진행해도 두 달 정도 걸린다. 이유불문하고 이런 상황에서 입대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 규정대로 하는 거라 아무 문제가 없다.


얼마 전, 우리나라는 '민주화 세력'에 의해 한국식 민주주의를 완전히 탈바꿈시켜 지금은 세계 어느 국가 못지않은 성숙한 민주 시민사회를 이루었다. 이처럼 '깨어있는' 국민의 60-70%가 공동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그 당시의 시민들은 자신의 생업을 위해 거리로 나서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나라를 선진국으로 수준으로 올려놓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사는 공동체 사회도 그에 걸맞은 생활터전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20여 년 전 우리가 했던 그 방식대로만 다시 한번 하면 된다. 우리 스스로 불의에 눈감지 말고 '진실'을 가리고 있는 모든 기준과 절차를 하루빨리 청산해야만 한다. 지금이 그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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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세대가 넘는 아파트 단지에서는 관리주체(위수탁 관리업체), 입주자대표회의(입대의),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 입주민의 역할을 국가의 삼권분립으로(정부의 행정권, 국회의 입법권, 법원의 사법권) 비유할 수 있다. 관리업체(행정)는 유지보수, 서비스 관리, 입대의 의결 사항의 집행 등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한다. 입주자대표회의(입법)는 아파트단지의 예산, 정책, 규약&규정 제정. 변경 등을 의결하는 역할을 한다. 선거관리위원회(사법유사)는 순수한 사법부는 아니지만 동대표 선출을 위한 선거 과정의 공정성, 투명성 및 적법성을 보장한다. 또한 선거와 관련된 분쟁을 조정한다. 입주민(균형과 감독)은 유권자의 역할을 하며 동대표를 선출하는 동시에 주민 의견 청취투표를 통해 관리업체 변경 등 주요 사안 결정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한 국가의 제4권인 '보이지 않는 언론'으로 삼권에 대한 '균형추' 역할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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