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밤 Sep 19. 2020

아나스타샤와 내 이름

나라는 사람

"올바른 어른이라면 딸에게 아나스타샤 같은 이름을 절대로 지어줄 수 없을 거예요. 왜 내게 이런 이름을 지어 주었죠? "
"그거 흥미있는 질문이구나. 이름을 지을 때는 사실 여러 가지를 생각하지. 이 아빠도 그랬다. 그건 그렇고 아나스타샤, 동생 이름은 벌써 정했니? 이름을 정하면서 뭘 생각했지?"
"이런 지독한 이름이 아니었다면 워쉬번 커밍즈도 좀 더 나를 좋게 봐줬을 지 누가 알아요."

90p 아나스타샤 1권, 산하출판사


기억 속 구십 몇 년도 쯤의 양천구청에는, 찾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파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던 만물상 같은 가게가 있었다, 이름은 연금매점. 오는 길에 연금 매점에 들른다고 약속만 해 준다면, 엄마의 볼일을 졸졸 쫓아다니는 일이 내키지 않다가도 냉큼 따라 나설 만큼 좋아하는 곳이었다.


우선 가게 입구에는 눕혔다 일으키면 눈이 깜빡이는 고가의 하이디 인형과, "엄마, 애완동물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이거라도 하나..안될까요?" 조르라는 듯, 키워보고 싶었던 각종 동물 인형들이 잔뜩 쌓여 있어 언젠가는 꼭 하나 데리고 오리라는 기대만으로 마음을 들뜨게 해주었다.

호객하는 인형들을 지나쳐 들어가면ㅡ하나같이 화려한 싸구려였지만ㅡ근사하게만 보였던 귀금속 매장도 있었고(처음으로 사 드린 엄마의 생일 선물도 바로 이 가게에서 심혈을 기울여 고른 모조품 귀걸이였다. 엄마가 곧장 더 촌스러운 장바구니로 바꾸어 버렸지만.), 군것질이며 식료품을 파는 코너, 옷이나 신발을 파는 코너도 있었다.

그렇게 별천지 같았던 연금매점에서 엄마는 딱 한 가지만을 흔쾌히 사 주셨는데, 책이었다. 그 중에서도 로이스 로우리의 <아나스타샤> 시리즈는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을 만큼 좋아했던 책이다. 총 일곱 권이지만 한 번에 한 권씩만 사 주었기 때문에, 책을 사서 오자마자 단숨에 읽어치운 뒤, 엄마가 매점에 다시 데려가 줄 날만을 목빠지게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다만 마지막 권을 사기까지는 너무 뜸을 들이는 바람에, 그 사이 아나스타샤보다 내가 좀 더 나이를 먹게 되어서인지, 결말이 조금 시시하게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책의 주인공 이름으로, 그 당시 나만큼이나 자기 이름을 미워하는 여자아이였다. 어떻게든 이름을 바꿔보기 위해 성당에서 세례라도 받으려 했을 만큼.

결국 아나스타샤가 싫어하는 것의 목록에 적었던 것들은 허무할 만큼 별 것 아닌 계기로 좋아하는 것들로 바뀌어 갔지만, 나는 아니었다. 서른 넷이 되어있는 지금까지도 멋대가리 없는 내 이름과 화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성씨를 바꿀 수 없고, 중간 자는 돌림자인 데다 이미 족보 인쇄까지 다 끝나버려 이번 생에 뭘 어쩌기는 틀렸다. 늦었지만 아나스타샤처럼 좋은 구석을 찾아, 마음을 돌리는 수밖에.

이전 01화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