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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Oct 31. 2020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래요?

책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 맵

부끄러울 뿐인 줄 알면서도 그간 써온 글들을 묶어 내놓습니다. 귀를 기울여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책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요.


[평범해지고 싶었어요]

저는 모든 것이 몹시 느린 아이로 태어나, 평범하지 못해 다소 우울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소원이었던 무던한, 여자아이다운 이름조차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결국 유년의 경험이 지배적이라고 하지요. 제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도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뛰어난 것보다는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상처를 주기보다는 상처입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런 제가 쓰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무해한 이야기이기를 바랍니다. 잘 쓰지도 못한 글을 통해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비판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잘 쓰여지지 못한 글이라도 누군가에게는 공감과 위로가 되어줄, 이야기의 힘을 믿고 썼습니다.


[당신의 발자국을 따라]

엄마는 스물 여섯에 첫 아이를 낳았습니다. 육아 휴직이라는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이제 막 초임 교사로 부임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출산 백 일만에 엄마는 공도의 시댁에 생때같은 아이를 떼어놓고 직장에 나갔습니다. 토요일 오후 네 시, 근무가 끝나면 기차와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컴컴한 시골길을 사십 분씩 걸어간 후에야 아이를 만났습니다. 아이가 돌이 될 무렵 할아버지가 쓰러지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쓰러지시던 날, 아이는 낯선 이웃집 아주머니에 맡겨졌고 엄마가 급하게 조퇴를 하고 내려갔을 때에는 울다 지쳐 땟국물이 말라붙은 얼굴로 할머니의 스웨터를 베고 잠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는 아직도 그 날을 잊지 못합니다. 엄마는 그렇게 첫 아이를 키웠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오 년 후인 서른 하나에 저를 낳았습니다.

그렇게 쓰러진 할아버지는 갑작스러운 암 선고를 받고 환갑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시절, 가진 것 없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무려 육남매를 대학에 보낸 대단한 할아버지입니다. 시골 분교의 교장 선생님이셨던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교육비를 대기 위해 매일 반찬 없이 밥만 든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서울로 상경한 남매들이 대학생으로, 고등학생으로 함께 자취하던 시절에는 공도의 시골에서부터 김치며 쌀자루를 이고 용두동의 고갯길을 오르셨습니다. 매해 할아버지의 제삿날이면 큰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며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여느 날처럼 용두동 자취방을 찾아오신 할아버지가 그러셨답니다. "오늘 고깃집 앞을 지나오는데 어찌나 냄새가 좋던지.. 한참을 그 앞에 서 있다가 왔단다..”

나의 아버지는, 내 눈에 비친 아버지의 인생은 그 불쌍한 할아버지를 닮아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비슷한 구석이 없어 보였던 두 사람, 엄마도 자꾸만 궁상스런 외할머니를 닮은 모습으로 늙어갑니다. 이제 내 나이는 엄마가 나를 낳아준 서른 하나를 훌쩍 지나 있습니다. 나도 나이를 먹어갑니다. 당신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길. 그 길 위에서 나는 당신의 외로움을 만납니다. 때로 완전하지 못했던 당신의 모순을 뜨겁게 이해합니다. 내가 넘치도록 사랑받았음을 압니다.


[직업은 주부입니다. 집에만 있지는 않습니다만]

직업은 주부입니다. 기꺼이 선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엄마, 아빠 둘 중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도맡았을 뿐입니다. 세탁기가 보급되고 반찬 가게가 널려 있는 요즘 주부라는 단어에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사람', 내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묘한 뉘앙스가 배어 있는 듯합니다. 양쪽 모두를 익히 경험해본 바, 주부와 백수는 다릅니다. 백수는 하는 일 없이 지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어진 할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인정을 바란 것도 아닌데 무심결에 날아드는 말들에 상처를 받았던 날도 있었습니다. 종일 갈고 닦은 집안을 보며 "나는 집안일은 적성에 안 맞아. 소질이 없어. 나는 결혼해도 그런 일엔 사람을 쓸 거야." 이야기하던 가까운 지인도 있었습니다. 사실 적성에 맞아 이 일을 택한 분들도 물론 존재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집안일과 육아는 적성에 맞지 않고 소질이 없는 일이더라도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일 뿐입니다.

사회생활이란, 적응이 되어 익숙해질 수는 있지만 결코 한 순간도 맘 편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 만큼 한 번 그 엄격한 궤도에서 튕겨져 나간 사람이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기란 더욱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그렇게 이해해 주실 수 없을까요? 주어진 자리에 만족하며 나름의 최선으로 살아가는 엄마들을 이제는 힘껏, 응원해 주실 수 없을까요? 겉모습은 비록 동네 아줌마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녀들도, 여전히, 꿈이 있거든요.


[사람이었네: 어쩌면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

전형적인 대립 구도는 지양합니다. 대들다 못해 선생님을 때렸다는 아이들, 어린 아이를 학대한 교사들, 서로가 서로를 따돌린다는 워킹맘과 전업 엄마들, 명절마다 포털 메인을 장식하는 자극적인 고부 갈등 스토리와 시월드 에피소드. 한 다리 건너 듣는 그렇다더라, 그랬다더라로 시작하는 수많은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 속의 사람들은 모두 극단적인 지점에 서 있습니다. 그렇게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서로를 괴롭히기 위해 살아가는 괴물처럼 느껴집니다.

뉴스 기사나 가쉽란, 단톡방에서 보고 듣는 기가 막힌 이야기보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평범하고도 따뜻한 일상을 믿습니다. 선생님을 따르고 존경하는 아이들, 사명감을 가지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선생님들이 아직은 더 많다고 믿습니다. 강제된 프레임 밖에서 자유롭게 연대하는 여성들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작은 것들을 위한 마음]

우리가 진정으로 위로받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나에게 그런 순간은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매해 둔 영화 시간에 늦어 모두가 전속력으로 뛰어갈 때 달리기가 느린 내 곁에서 페이스를 맞춰 주던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합격이라는 감격과 기쁨을 누리면서도 시험에 떨어진 나를 불러 문제집과 원서들을 전해 주던 언니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커피 한 잔을 사러 들른 가게에서 정성이 담긴 음료와 따뜻한 환대를 받았을 때 나는 위로받았습니다. 우산을 깜빡한 아침, 비를 맞고 서 있는 제게 우산 한 켠을 내어주신 아이 친구 어머니가 그러했습니다.

내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돌아볼 줄 아는 여유, 기분 좋은 인사로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기 바라는 친절, 비를 맞고 서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우산을 권하는 따뜻한 용기.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마다 나를 위해 준 누군가의 마음들에,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썼습니다.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행복했던 순간들의 기록을 모았습니다. 모아놓고 보니 하나같이 평범한 하루들이었습니다. 유난히 예뻤던 어느 저녁의 하늘, 손수 키운 나무의 열매를 딸 때, 형편없는 솜씨로 모짜르트 소나타를 연주하던 순간도 나에게는 행복이었습니다.  

어느덧 꽤 자란 아이와 갈 수 있는 곳, 할 수 있는 일들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질리도록 다녔던 장소와 젊은 날 반복하던 일과들도 새로운 기쁨이 되어 줍니다. 소중한 것들은 모두 가까이에 있습니다.


 [자기만의 방]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 벌써 십 년 전에는 끝마쳤어야 할 질문을 저는 여전히 제 자신에게 묻고 있습니다. 십 년 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묵직한 물음 하나가 더해졌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려 합니다. 설레는 계절, 여름이 돌아오면, 모두 잠든 밤의 자유가 찾아오면 아직 철들지 못한 아줌마의 마음은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서재는 저에게 그런 공간입니다. 낮에는 아이의 공부방이자, 거창할 것 없는 작은 공간이지만 자기만의 방 안에서 비로소 나는 꿈꿀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우리 모두는 유일하고도 고유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의 삶 또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야기일 테구요. 브런치를 시작하며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삶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싶어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를 돌보며 잠도 부족할 아기 엄마가 글을 씁니다. 직장생활만으로도 충분히 벅찰 회사원들도 씁니다. 누군가는 이미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지만 누군가는 단순히 글쓰기가 좋아서도 씁니다. 때로는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도 씁니다. 그건 아마 우리 모두가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여행자들이라서가 아닐까요? 달콤한 휴식보다, 꿀맛같은 잠보다 절실한 것은 어쩌면 다가올 하루를 지탱해 줄 삶의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미를 찾고 있는 당신에게 나는 조심스레 글쓰기를 권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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