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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19. 2020

스물 여섯, 여전히

20대의 기록 #3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

p277 <호텔 니약따>, 비행운, 김애란


2011년, 세 번 째 시험에 떨어진 가을.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분으로 또 다른 일 년을 준비할 마음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일단 일을 시작했다. 일이 하고 싶었다.

처음 구한 일은 나름 명문 중학교에서의 2주 시간 강사. 담임을 맡으신 선생님이 신혼여행을 다녀오시는 사이의 대타였다. 기말고사도 고교 입시도 끝난 후의 중학교 3학년. 미리 준비해주신 유인물을 나누어 주고 같이 미드만 보다 나오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아이들은 자막도 없는 미드를 보며 선생인 나보다도 더 자주, 빠르게 적재적소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재미있게 화면을 보면서 소리 한 번 안 질러도 알아서, 나누어 준 유인물을 완성해서 제출하던 모범생들이었다.

엘리베이터도 있던 건물. 교무실 선생님의 자리에 앉아서, 선생님의 컴퓨터로, 선생님의 스케줄이 빼곡한 달력 앞에서, 뭐가 그리 다 부러웠다.

다음은 두 달짜리 기간제. 수유역에서도 차로 한참을 들어가는, 산 아래 자리잡은 여자 고등학교로 출근하게 되었다. 출근은 7시 50분까지였는데 목동에서 가는 데만 한 시간 반은 걸렸다. 결국 잠을 못 줄이고 월 30에 수유역 인근에 있던 여성전용 고시텔에 들어갔다. 시수가 많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리 피곤했는지. 퇴근하면 정신없이, 밥도 굶고 시체처럼 잠만 잤던 기억이다.

공부를 아주 잘 하는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기특했다. 나 역시 썩 훌륭한 입시 선생은 못 되었지만, 최선을 다해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 노력했다. 학교는 산 속에 폭 안겨 있었고 교정이 예뻤다. 인자하신 교무부장님, 서울 외곽이라서인지 초임으로 부임하신 젊은 선생님들도 많았다. 학구열도, 극성 학부모도 없는 학교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시간이 흘러 2012년, 봄. TESOL자격증은 괜한 시간과 돈을 써가며 따 둔 것은 아니었는지, 써먹을 데가 있었다. 의사소통 중심의 영어교육을 강화한다는 새 기조에, '회화전문강사'라는 요상한 이름의 새 일자리가 대거 생겨나던 때였다. 일과 시험 준비를 병행하는 수험생의 대부분은 기간제보다 회화강사를 선호했다. 무엇보다 품이 많이 드는 담임 업무를 맡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메리트였고, 월급도 적지 않으면서, 수업 시수도 21시간 이내로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교무실에서 떨어진 별관의 언어교육부. 책상 아홉 개 짜리 좁은 공간에는 생각지 못한 사회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막내였던 나를 포함, 경력이 꽤 되는 30대 후반의 남, 여 기간제 선생님은 나름 민주적인 학교 문화의 돌연변이같은 꼰대 부장님이 던져주는 눈치를 살피기 바빴고, 나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던 정규직 선생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셨다. 차별과 평등이 공존하는 불편한 공기 속에 있었다.

주요과목은 수준별 학습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경력이 일천한 내가 아무래도 성적이 낮은 반을 주로 맡게 되었다. 수업을 진행할 수도, 수업을 방해하는 행동을 통제할 수도 없는 아이들만을 모아 놓은 교실. 교과서조차 준비되지 않은 날이 대부분이었고, 사정을 하여 그나마 교과서를 가져온 날이면 부동 자세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책을 갈갈이 찢어 바닥에 뿌림으로써 반항의 할당량을 채웠다. 그나마 그 중 가장 믿었던 도끼에 크게 실망하는 일도 있었다. 남자친구와 벌건 대낮에 대로를 걷다, 맞은 편에 걸어오는 아이가 너무 반가워 먼저 아는 척을 했는데, 며칠만에 선생님이 남자랑 모텔에서 나오더라는 소문을 낸 것이다.

반대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성적과 내신에 목을 맸기에,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난 뒤면 중복 답안, 주관식 답안에 대한 항의가 빗발쳤고 학생부에 한 줄 들어가는 교내 시상 경쟁 때문에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처음으로 합격과 불합격이 아닌 이 일을 하고자 했던 마음, 그 마음이 직업을 이어갈 동력이 될 수 있을지를 솔직하게 들여다 보게 되었고 그 해 여름까지 노량진 학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스터디를 이어오던 나는 수험 중단, 포기를 선언했다.

(그 날. 아직 먼 길을 더 가야 할 친구들의 마음도, 나 때문에 아마도 조금은 외로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모두 훌륭한 선생님이 되고 나는 아줌마가 되어 있는 지금까지, 우리가 서로를 아끼고 응원하며 지내고 있는 건 모두 그 두 사람의 남달리 너그럽고 선한 성품 덕분이다.)


통제 불능의 아들을 키우는 엄마가 된 지금, 뒤돌아 생각하면 내가 너무 서툴고 부족했을 뿐. 충분한 시간 속에서 더 노련해지고, 현명해지기를 기다리는 수련의 과정이 없었을 뿐. 아직 까마득히 어린 아이들 앞에서 열 내고 상처 받을 필요는 없었는데. 좋은 선생은 커녕, 제대로 된 어른도 되어주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마음. 수험이야 그만둘 수도 있는 것이지만, 결론이 같았더라도 과정만은 아쉬웠다고 생각한다.

1학기를 마친 여름 방학, 2주 간의 영어 캠프를 무사히 마친 후에, 지긋지긋하던 그 교무실을 떠나 작은 회사에 입사했다. 그새 정든 선생님들과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거한 송별회까지 치른 뒤 학교를 떠날 때엔, 앞으로 출근할 회사만큼은 평생 직장이 될 거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스물 여섯. 여전히 애송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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