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넷. 장래 희망이 생겼다.
우리 학교는 한 학년이 육백 명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백 등 안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백 등 밖에 있을 때도 많았다. 어른이 되면 난 무엇이 될까 생각해 본 적은 있었지만 대단한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생활기록부 장래희망 칸에는 농부라고 써 냈다가 선생님과 얼굴을 붉혔다. 나도 철이 없었다. 막 <월든>을 읽었던 무렵이기 때문이었을까? 끝까지 장래희망을 바꾸지 않겠다는 나에게 선생님은 농삿일의 수고를 알기나 하느냐고, 언젠가 네가 정말 농부가 되어 있는지 꼭 확인하시고 말겠다며 씩씩거리셨다.
2학년 2학기가 시작될 무렵 처음으로 전국 학생 모의고사라는 시험을 보았다. 수학 시험지를 받았는데 첫 장부터 풀 수 있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OMR카드에 동그라미로 그림을 그리다가 시간이 되어 제출했다.
성적이 나왔는데 선생님이 부르셨다. 혹시 내가 낙서한 것을 보시고? 벌청소로 교무실 바닥이나 수세미질하던 여느때처럼 혼이 날 각오를 하고 찾은 교무실에서 선생님은 의외의 밝은 표정이셨다. 이번 모의고사에서 내가 전교 32등을 했다고 말씀하셨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혹시 정답을 따라 그림을 그리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었다. 내 수학 점수는 백 점 만점에 27점이었다.
그날 선생님은 지금부터 아주 열심히 한다면 너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으로 나도 무언가 해낼 수 있을 지 모른다는 꿈을 꾸게 된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수학이 27점이었고 인수분해도 할 줄 몰랐다.
고3으로 넘어가는 겨울 방학에 나는 오랜 수포자 생활을 청산하고 군데군데 침 자국만 남아 있던 '수학의 정석'을 꺼내어 폈다. 수리영역 첫 장의 쉬운 네 문제를 모두 맞게 되기까지 반 년이 넘게 걸렸다. 수능을 앞둔 일 년 동안 나는 수학과의, 아니, 수포자였던 나와의 싸움에 모든 것을 걸고 매달렸다.
평소 공부를 잘 하던 친구들도 수능이라는 단 하루, 단 한번의 시험을 안타까운 실수들로 망치는 사이 나는 전에 없던 쾌조의 컨디션으로 아는 문제를 차분하게 풀어내고 모르는 문제는 요리조리 때려 맞추었다. 느낌이 좋았다.
EBS 해설방송을 틀어놓고 오빠가 대신 채점을 해 주었다. 숨을 죽인 채 채점을 시작한 오빠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맞았어! 이것도 맞았어! 많이 맞았어!”
한때 나의 과외 선생님이기도 했던 오빠는 나의 어마어마한 수학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채점을 마침과 동시에 괴성을 질렀다. 결국 나는 마지막 수학 시험에서 네 문제를 틀렸다. 네 문제를 맞던 나였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얼떨떨함이 휩쓸고 간 뒤에야, 이것이 꿈이 아닌 생시라는 걸 믿게 된 부모님의 환호가 이어졌다. 나의 진학에 대한 가족들의 열띤 회의도 시작되었다.
아빠가 근무했던 회사는 일 년에 단 삼 일 뿐인 여름휴가 외에는 주 6일 근무에 야근도 많았다. 고된 직장생활을 버티며 교사였던 엄마의 눈치보지 않는 퇴근과 안식 같은 여름방학, 겨울방학을 평생 지켜보았던 아버지는 여자에게 그만한 직장은 없다는 데에 거의 신념에 가까운 믿음을 가지고 계셨다. 다만 아빠는 내가 사범대에 갈 수 있는 성적이 못 된다는 걸 익히 알고 계셨기에, 이전까지 한 번도 선생님이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비추신 적이 없었고 나도 그토록 너그럽고 인자하시던 아버지가, 그날 이후 십 년간의 내 인생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멱살 잡이로 끌고 다니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 아빠는 내가 교대에 지원하기를 바라셨다. 나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아빠는 일반 대학교의 교육학과로 나를 회유했다. 나는 평생 부모님 말씀이라고는 듣지 않았으면서, 이상하게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에는 돌연 효녀가 되어 아버지의 말씀을 따랐다. 나는 제일 중요한 가 군에 아빠의 희망사항을 반영한 지원서를 썼다. 그리고 나 군에는 내가 가고 싶었던 학교의 어문계열을, 다 군에는 어차피 안 되라는 생각으로 법대를 썼다.
가 군의 논술이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나는 논술시험을 하루 앞둔 날에도 밤을 새워 만화영화를 정주행하고 있었다. 가 군의 시험 컨디션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 군에 있는 학교에 꼭 합격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중요한 시험을 망칠 생각은 전혀 아니었는데, 일주일 연속으로 밤을 새운 나머지 논술 시험장에서 몇 자 쓰지도 못하고 쿨쿨 잠이 들어버렸다. 보다 못한 감독관님이 나를 흔들어 깨운 건 시험 시간이 20분 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뒤늦게 허겁지겁 썼다. 종이 울렸고, 2000자 원고지에 400자 분량의 서론 뿐인 시험지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장을 걸어 내려오며, 나는 마지막이 될 교정을 한 번 크게 훑어보았다. 이제 다시 여기 오게 될 일은 없겠구나. 시원 섭섭한 안녕을 고했다.
일 주일 뒤 나 군의 논술 시험장에서 나는 혼신의 글쓰기를 했다. 곧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예상대로 가 군과 다 군 모두 불합격이었고, 이제 일반 학과에서 교직이수 자격을 따기가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걱정에 아빠는 몸져 누우셨다. 나는 코까지 골면서 잠이 들었던 논술 시험장에서의 일은 평생 고백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가 군은 여자 학교, 나 군은 남녀 공학이었다. 나는 곧 1차 합격생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신입생 오티에도 참석했다. 아직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캠퍼스 구석 구석을 걷고 또 걸었다. 봄이 오기도 전에, 내가 꿈꾸어 온 대학 생활이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야속하게도 며칠 뒤, 가 군의 학교에서 2차도 아닌, 2차 '추가' 합격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닫힌 문에 몸을 우겨 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할 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하룻밤을 꼬박 지새웠다. 조용히 넘어간다면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정말 그러기로 마음 먹었다.
아침이 왔다. 안방 문을 살짝 열어보니 돌아 누운 아빠의 등이 슬퍼 보였다. 이 다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는 한 마디면 충분하다. 몸져 누워있던 아빠의 기분도, 나의 꿈꾸던 대학 생활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 지 모를 내 인생의 방향도.
재촉하는 엄마를 따라 나섰다. 우리는 함께 나 군의 입학처에 가서 등록금을 환불받았다. 학생들이 오가는 테니스 코트를 지나며 나는, 이 학교에 남고 싶다는 마지막 호소를 했다. 이미 오는 내내 죽상을 하고 엄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던 터였다. 갑자기 엄마가 뺨을 때렸다. 눈 앞이 번쩍 하더니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그날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3 내내 알차게 찌운 10kg의 체중을 한 번에 감량할 수 있었다. 지금은 생쇼를 해도 빠지지 않는 살인데. 그땐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평준화된 일반 고등학교라는 우물 안에서, 그나마 영어를 잘 한다고 믿었던 나는 영어교육과에 지원했다. 국어교육과가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이듬해 생겼다.) 아니다. 나는 외국어에 재능이 없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모두 내 탓이다.
어릴 적 나는 몇 년에 걸쳐 한자를 2급수까지 떼었는데도 다섯 오와 바를 정자도 헷갈려 구별을 못한다. 일본어 시험에서 맞으라고 준 문제에 '일본'의 '日'을 한 일자로 자신있게 적어 내고 틀린 적도 있다. 애국심으로 한 일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니까 한자도, 영어도 그렇게 오랫동안 익히고 배우고도 그 지경인 것을 보면 나의 언어 뉴런은 모국어에서 성장을 마감해버린 것이 아닐까.
나는 여자고등학교를 나왔다. 여자들만 모인 집단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줄곧 공부 잘 하는 모범생으로 살아온 여자들이 모인 집단은 처음이라는 것은 간과했다. 나는 그런 집단에 속한 적이 없었다. 어느 누구도 나처럼 27점이라는 점수는 받아본 적이 없었으리라. 54명의 동기들 중에 나는 늘 꼴찌였다. 게다가 모두가 성실하고 부지런했다. 어떻게 그런 반듯한 아이들만 모아 놓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아니, 어떻게 그런 반듯한 아이들이 있는 곳에 저를 추가로 끼워 넣으신 건가요? 지금은 이렇게 묻고 싶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콩밭에 가 있었다. 사범대에 다니는 학생이면서도 선생님이 될 생각도,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뚜렷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꿈은 생기기도 사라지기도 했는데, 그렇게 쉽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나는 연속 두 학기 학사경고를 받았다. 세 번이면 제적이었다. 제적의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어찌어찌 4학년 졸업반이 되었다. 여전히 전공인 영어교육에는 제대로 된 실력을 쌓지 못한 채였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 영상학과에 복수전공을 신청해 둔 상태였지만 뒤늦게 빵구난 전공필수 학점을 채우는 데 코가 석 자라, ‘어도비 프리미어의 이해, 포토샵의 이해, 영화학 개론.’ 이 년간 이 세 과목을 수강한 게 다였다.
4학년 1학기 교생실습에서 너무 예쁜 아이들을 만난 것도 나의 불행이었다. 학을 떼고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나는 가르치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다. 영어실력도 턱없이 부족했다. 선생님이 사람만 좋아서 될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아이들이 좋았다. 어떤 아이들은 나보다 영어를 훨씬 잘 했다. 어떤 아이들은 이미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어떤 아이들은 내가 그 아이에게 줄 수 있었던 것보다 커다란 위로가 되어 주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그저 아이들을 자주, 꼬옥 안아줄 수 있는 따뜻한 유치원 선생님이 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마지막 8학기. 나는 뒤늦게 임용 시험을 보고 선생님이 되기로 마음을 정했다. 품고 있던 꿈들마저 모두 잃어버리고 사라진 뒤였다. 졸업을 유예하는 대신 열아홉의 그 때처럼, 시험이라는 한 방에 나의 운을 걸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나는 시험 운이 좋다고, 특히 사지선다 정답 고르기에 능하다고 그때까지도 굳게 믿고 있었다.
실제로 첫 해에는 아쉬운 성적으로 1차 시험에 떨어졌다. 그리고 나서는 줄줄이 턱도 없는 점수로 떨어졌다. 오랜 수험 생활에도 2차 시험 고사장은 한번도 밟아보지 못했다. 사람의 인생에는 행운의 총량이라는, 어느 정도 공평하게 작동하는 알고리즘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나는 열 아홉살에 내 인생의 운을 다 끌어다 쓴 것이 틀림없었다. 이후로는 요행에 기댄 모든 일들에서 쓴 맛을 볼 뿐이었다. 일찍 찾아와 준 행운은 달콤했지만 내 청춘의 독이었다.
스물 여섯. 연이은 세 번의 낙방과 긴 수험 생활에 진저리가 난 나는 비정규직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KO를 외치며 이 길은 나의 길이 아니었다는, 경솔하고 무책임한 결론에 다다랐다. 직장생활 틈틈이 수험 공부를 계속하겠다던 나의 계획은, 시간 나는 대로 자기 소개서를 쓰고 취업 사이트를 뒤지는 쪽으로 경로를 틀었다.
남은 인생이 어찌 될 줄 알고 그랬을까. 나는 이미 곳곳이 쑤셔놓은 벌집 같은 학점으로 졸업해 버린 뒤였다. 3.0도 되지 않는 학점으로는 번듯한 직장에는 서류 통과조차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넓고 근사한 일들은 많아 보였기에. 나는 한국문학번역원, 코이카 인턴에도 지원했고 월트 디즈니사의 한국 지사에도 영어로 된 자소서와 커버 레터를 써 보냈다. 고작 스물 여섯 살이었다. 무엇이 되든 안 되든, 재도전의 기회는 충분히 남아 있었고 여전히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과는 예상대로, 지원한 모든 곳에 다 떨어졌다. 딱 한 군데, 별 생각없이 지원한 곳에서만 면접을 보러 오겠냐는 전화가 왔다. 비가 무척 많이 내리던 여름날, 검은색의 꼭 끼는 투피스를 입고 높은 구두를 신고 빗속을 헤치며 면접장에 도착했다. 사귀는 사람이 있느냐며 결혼 계획을 떠보는 질문에,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등산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따라 산에 자주 다녔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합격이었다.
내가 일하게 된 부서는 여자만 셋, 그리고 셋 다가 동문이었다. 예뻐하지도 않았던 학교 덕을 보는 건가. 그랬을 지도 몰랐다. 우리 학교에 나같은 불량품은 없었다. 나같은 인물을 추가 합격에 졸업까지 시켜준 고마운 학교에 나는 수없이 먹칠만 하며 살았다. 게다가 등산을 즐긴다는 대답이 사내 산악회 활동에 열심이셨던 부장님의 호감을 산 덕분인지, 나는 조속한 결혼 계획을 밝히고도 입사에 성공했다.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대기업도, 공기업도, 복지가 좋기로 유명한 벤처 기업도 아닌데, 뒤늦게 보게 된 입사 희망자들의 이력은 의외로 면면이 화려했다. 취업은 수험만큼이나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었다. 이백 몇 명 뿐인 작은 회사지만, 그래도 월급을 받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얻은 것에 나는 조금은 더, 오랫동안 감사하며 나를 선택해 준 부서 선배들에 보은했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법인에는 젊은 변리사들을 가르치고 학술적 도움을 주시는 고문 역할의 '박사님'이 계셨다. 내가 회사에 들어가 처음 배운 일도 박사님 출근 전 신문 가져다 드리기와 정해진 날짜에 박사님 방 화초에 물 주기, 박사님 방 앞 공용 정수기의 생수통 교체하기 등이었다. 회사원이 되었다는 기쁨에 들떠 처음에는 복장에 꽤 신경을 쓰기도 했지만, 생수통을 교체하거나 화분에 물을 주러 다니는 내 일과에 예쁘고 여성스런 정장은 어울리지 않았다. 자연히 나는 점점 편하고 움직이기 좋은 옷을 입게 되었다.
영어를 전공했어도 업계의 전문적인 용어는 잘 알지 못했다. 생초보 사원인 내가 작성한 서신들은 늘 실수 투성이었다. 사람 좋고 친절한 신입 변리사들은 더 뜯어고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어쩔 수 없는 문장 몇 개만을 고쳐 돌려주었지만, 깐깐한 고참 변리사님들의 일을 맡을 때면 빨간펜으로 너덜너덜해진 내 서류철이 부끄러워 누가 볼새라, 재빠르게 파일을 집어들고 총총, 자리로 돌아오고는 했다.
영어 서신 담당이라는 업무를 하러 들어왔는데,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나보다 영어도 잘 하는 사람들에 사면초가 둘러싸이게 된 나는 업무가 외국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스탭 모두가 전문직은 아닐지라도 각자의 영역에서만큼은 모두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전문가로 보였다. 그 가운데 나는, 나만, 그저 똑똑한 사람들의 근무 시간을 절약해주기 위한 수고를 하고 돈을 받는 것 같았다.
아직 아무것도 아닌 자. 나는 미생(未生)이었다. 그래도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첫 엠티에는 노래를 부르라 하셔서 눈 꼭 감고 트로트도 불렀고 체육대회 때는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고 송년 합창대회에서 우스꽝스러운 춤도 열심히 추었다. 뒷풀이 자리에서는 술도 부지런히 받아 마시다 지하철이 끊긴 시간에 이 만원이 넘는 택시비를 내고 집으로 갔다. 어렵사리 얻은 첫 직장은, 녹록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소중했다.
나는 왜 그렇게 모르는 것이 많았을까. 여성에게,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이라는 소중한 두 개의 가치는 쉽게 충돌하며 양립하기 힘든 관계라는 것을. 그야말로 바보같이 아무것도 몰랐기에 나는 중요한 면접 자리에서도 사귀는 사람이 있고 결혼도 할 것이라는 맹랑한 대답을 할 수 있었으리라. 나는 그때까지도 결혼이라는 건 사랑하는 마음이 무르익었을 때 하게 되는 것이려니,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순진한 사고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했다. 입사한 그 해에.
나의 결혼은 모두의 축하와 축복 속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나조차 예상치 못한 임신 소식을 전했을 때에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임신은 곧 출산이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했고, 출산한 여성이 다음 날 출근하여 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백 일이라는 애매한 공백 기간 동안, 셋이서도 간신히 끝내던 일들을 둘이서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한다면, 그건 공포 영화보다도 끔찍한 이야기였다.
달랑 셋 뿐인 우리 부서에는 나와 바톤을 터치하며 회사를 나간 과장님 외, 두 명의 대리님이 계셨다. 한 분은 결혼했지만 아이 계획이 없으셨고, 또 한 분은 아이가 있지만 주말에만 친정에 맡겨두었던 아이를 데려와 생활하셨다. 나는 대리님의 예쁜 딸 사진을 보며 감탄하면서도, 그게 어떤 의미인 줄을 몰랐다. 어째서 평일에는 아이와 함께 살 수 없는지 몰랐다.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결혼식은 어디서 어떻게 하셨는지, 신혼여행은 어디로 떠나셨는지. 그런 시시한 질문이나 하고 있었던 내가 대리님은 얼마나 가소로우셨을까.
옆 부서에는 아이를 낳고 복직하셨다는 선배님이 계셨다. 출산휴가 3개월이 전부인 작은 회사에서, 그 선배님만은 일 년이라는 육아 휴직을 당당히 사용하고 돌아오셨다는 이야기가 여자 직원들 사이 영웅담 내지는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었다. 선배님은 전무님을 직접 찾아 담판을 지었다고 했다. "나는 곧 출산 예정인데, 아이가 태어나면 돌봄을 도움받을 곳이 없습니다. 일은 계속하고 싶습니다."
선배님은 자리를 비운 일 년의 시간동안 그녀의 책상은 물론 묵직한 존재감마저 그대로 남겨두었을 만큼 일에 대한 평판이 좋았다. 전무님은 그녀에게 일 년간의 휴가는 물론 복직한 후에도 8 TO 5라는 파격적인 유연 근무를 허락했다. 선배님은 아침 일찍 출근해서 쉴새 없이 업무를 처리한 뒤에는 칼같이 퇴근 시간을 지켜 아이를 데리러 갔다. 가림막 두어 개를 사이에 둔 지근거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을 나는, 그 치열한 삶이 곧 나에게 닥칠 차례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결혼식은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 지, 신혼여행은 어디로 떠나야 할 지에 대해서만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오가며 동동거리는 주변의 수많은 그녀들을 보면서도, 나이 스물 일곱에 결혼을 하고 피임도 할 줄 몰라 스물 여덟에 아이를 낳았으니 낫 놓고 기역 자를 모르는 바보 멍청이가 아니면 무언지.
나의 첫 직장 생활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아줌마가 된 지금 나는 직장은 다니다가 관두었어요, 라는 말조차 잘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정말 끈기 있게 버티다 버티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인내한 세월을 '경력'이라고 부르고 그만한 일의 내공을 갖춘 사람들을 경력 '단절' 여성이라 부르는 것일 테다. 나는 직장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짧은 직업 체험을 한 것이었다.
스물 여덟. 다시 무직으로, 이번에는 아이를 임신한 몸까지 되어버린 나는 통번역 대학원에 진학해 보겠다는 어물쩡한 계획을 세웠다. 책이 좋으니까, 문학이 좋으니까. 나는 남산만한 배를 책상과 의자 사이에 끼워넣으며 강남 역에 있는 입시학원에 다녔다. 자네, 영어를 잘 못 한다는 주제파악은 또 엇다 팔아 먹었나. 치명적인 학부 학점은 또 어떻고. 대체 어느 대학에서 자네를 받아줄 것인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대학원 원서를 넣어보기도 전에 뱃속의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아이가 태어나던 해, 아빠가 정년을 채우고 은퇴를 하셨다. 해산을 하며 친정에 머물던 나는 볕이 좋던 어느 날, 처음 밖을 나가 엄마와 가까운 산을 걸었다. 엄마는 은퇴한 아빠에게 우울증이 온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우울증의 원인이 바로 나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씀도 하셨다. 아빠가 그토록 원하던 교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는 나 때문이라는 거였다. 이른 결혼도 갑작스런 취업도, 부모님의 애끓는 기대를 거듭 무시한 결정을 해왔으면서도 나는 이번에도 돌연 효녀가 된 양 아버지의 우울증을 낫게 해 드리리라 결심했다. 이후의 일들은 익히 글로 써 온 것들이다. 나는 내가 자신했던 모든 '시험'에서 줄줄이 낙방하며, 쓴 맛이 나는 인생의 어느 부분만을 깊이 파고 들어갔다.
이상한 점이라면 나는 점점 팍팍하고 어두워져 가는데, 우울증을 핑계로 내 등을 떠밀던 아버지는 어린 손주를 돌보시는 수고에도 꽤 행복해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우울증은 개뿔. 입맛도 잃고 웃음도 잃었다던 아빠는 밥만 잘 드시고 아침 저녁으로 하하하, 껄껄껄, 내 아들과 동네를 누비며 웃기 바쁘셨다.
얼마 전 우연히, 티비에 나온 여자 연예인이 MC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십대 초반에 잡지 모델로 데뷔한 그녀는ㅡ여전히 소녀 같은 앳된 외모에도 불구하고ㅡ어느덧 삼십 대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광고의 이미지를 통해 널리 알려진 얼굴과, 톱 스타로 분류되어온 인기에도 불구하고, 배우라는 직업인으로써의 그녀의 커리어에는 크게 방점을 찍을 만한 히트작이 없었다는 생각을 내가 하고 있을 때 즈음 그녀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지금이 좋아요. 20대 때는 무한하게 열린 가능성들 때문에..오히려 힘들었어요.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선택들이 좁아지고 나니 마음이 편해요." 톱 스타인 그녀는 아주 솔직하고 덤덤하게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곧 개봉할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나온 자리였지만, 그 순간 그녀는 연예인이나 영화 배우가 아니라 영혼이 있는 한 사람처럼 보였다. 화장품 광고 속 모공 하나 없는 완벽한 그녀가, 아파트 광고 속 저는 이런 멋진 집에 살아요. 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친숙하게 느껴졌다.
서른 넷. 그 오랜 세월을, 대학 입시라는 단 한 번의 요행을 잊지 못해 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던 부모님도 기다림에 지쳐 이제는 나가 떨어졌다. 이제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는 '대학에나 갈 수 있을 지 모를, 공부에는 재주가 없는 딸'로 나를 다시 정의하신 것이리라.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20대는 지나갔다. 여전히 세상은 넓고 누구나 꿈꾸는 근사한 일자리는 너무나 많다. 하지만 나는 그 회사의 신입사원이 될 수는 없다. 이 나이가 되도록 경력 한 줄도, 배워둔 기술도 없다.
아르바이트를 하려 해도 제약이 있다. 숱하게 눈에 띄는 가게들도 대개 오픈조 내지는 마감조를 뽑는지라 근무 시간이 나와 맞지 않는다. 정확히 아이가 유치원에 머무는 몇 시간 사이에 일도 하고 정시 퇴근도 마쳐야 하니, 알바 알선 사이트의 페이지를 넘기고 넘기며 그 많은 일자리 중에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부터가 바늘구멍이다. 그러니 일을 하며 자아실현을 꿈꾸는 것은 어불성설.
선택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줄어들자 되려 맘 편히 주어진 일들에 집중할 수 있었다던, 서른 여덟 여배우의 말을 나는 깊이 공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방구석 글쓰기밖에 남지 않았을 때서야 나도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누군가 나에게 장래희망을 적어 내라는 종이를 내민다면 나는 부끄럽지만, 자신있게 쓸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다고.
가리워진 나의 길은 어쩌면 내 안에 있었다. 나는 이제 나의 길을 가련다. 묵묵히 힘을 내어, 이번만큼은 그 먼 길을 기어이 완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