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_데미안, 헤르만 헤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요즘 내가 유일하게 챙겨 보는 드라마의 제목이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브람스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음악이라는 공통 분모 아래 각자의 생을 치열하게 고뇌하며 나아가는 스물 아홉 청춘들의 이야기이다. 하나같이 매력적인 여러 명의 등장인물 가운데서도, 나는 유독 여주인공에게 마음이 갔다.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경영대 졸업을 코앞에 둔 시점에 뒤늦게 바이올린을 향한 열정을 깨닫고 4수 끝에 음대에 입학한, 사연 있는 여자다.
그러한 주인공이 4년 내내 꼴찌를 도맡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스물 아홉. 그녀는 경영학과 4년, 음대 4년, 도합 8년 만의 늦은 학사 졸업을 앞두고 있다. 여전히 그녀는 단 하루도 악기 연습을 쉬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목덜미에는 잦은 마찰로 생긴 붉은 줄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
방학 기간 동안 그녀는 음악가들의 공연이나 음악 영재들의 후원을 주관하는 재단에서의 짧은 인턴 생활을 했다. 일 머리를 인정받은 덕분에 무려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을 제안받기도 한다. 하지만 바이올린밖에 모르는 우리의 주인공은 취업 대신 대학원에 진학해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겠다는 꿈을 놓지 않는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정이야 그게 되겠나 싶다. 차마 말은 못 할 뿐이다. 그러던 지난 주, 11회 방송에서 팩트폭격 빌런 박 과장이 기어이 그녀에게 뼈를 때리는 조언을 퍼부는 장면이 등장하고 말았다.
"송아씨 바이올린 몇 년 했어요? 취미로 했을 때 빼고, 음대 준비했을 때부터. 아직 십 년 안되죠? 미안한 말이지만 시간은 절대 못 이겨요. 송아씨도 알잖아. 일만 시간만 투자하면 전문가가 된다, 어쩐다 하는데 송아씨 친구들한테 물어봐요. 일만 시간 연습은 열 살 정도에 이미 다 넘었을 걸? 네다섯 살 때부터 하루에 몇 시간씩 바이올린만 붙들고 교수 레슨받았던 친구들일 거 아니에요 다. 미안한 말이지만 송아씨는 시작이 너무 늦었어요.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따라잡을 수가 없다니까? 좋아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현실적인 말을 해줘야 하는 사람도 있어야 될 거 같아서.."
송아씨(그렇다. 그녀의 이름은 송아다. 채송아.)가 이제와 아무리 바이올린을 사랑하고 연습에 매달리더라도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 내지는 최소한 오랜 시간 치열하게 악기를 다루어 온 사람들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는 충고. 뭐지. 나에게 하는 말인가? 주인공의 감정선을 공감하며 따라가던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오지랖에 덩달아 화가 치밀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곱씹어볼수록 구구절절 지극히 맞는 말인 줄을 알아, 대꾸할 기운도 없이 내 속만 더 쓰려오는 것 같았다.
오늘은, 그녀가 다니는 대학에서 열린 재단의 취업 상담회에서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신이 있었다. 요즘 매 회 뼈를 맞고 다니는 주인공도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앳되어 보이는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저는 플룻 전공인데요. 공연 기획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음대를 나와서 공연 쪽 일 하시는 분들을 보면 이상하게 금방 그만두시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주인공의 인턴 시절부터 유일하게 괜찮은 어른이 되어준 직장 상사, 차 팀장님은 잠시 머뭇거린 후 질문에 답했다.
“어... 음악을 하시다가 공연 쪽 일을 시작하시는 분들 중에는, 조심스럽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견디지 못해서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눈에 띄지 않게 어두운 옷을 입고 깜깜한 무대 뒤에 서서 나와 같이 음악 공부를 했던 친구, 동료들이 조명을 받으면서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 마음이 힘든 거죠. 간절했던 꿈과 이별한다는 건... 말처럼 간단한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순간. 잊고 지냈던 옛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2007년, 21세기로 접어들며 공연 예술계도 변화와 고급화를 모색하고 있던 때였다.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는 국내 최고의 공연장이라는 자부심과 명성에 걸맞게, 공연 도우미라는 우리말 대신 최초로 '하우스 어텐던트'라는 근사한 명칭을 붙여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아르바이트를 선발하고 있었다.
여름방학, 서류 심사와 면접을 무사히 합격한 뒤 개강과 함께 교육생 생활은 시작되었다. 한 달이라는 견습 기간을 거친 뒤 근무를 시작하는 조건이었다. 아직도 생생하다. 공연장 투어를 하던 날. 좁은 통로와 대기실을 지나 음악당의 무대 위에서 끝없이 펼쳐진 객석을 바라보던 그 날이.
하우스 어텐던트의 업무는 그야말로 올라운더 플레이였다. 공연 시작 전, 먼저 좌석을 돌며 이상이 없는지 점검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직원 식당에서 식사도 미리 해결한다. 관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바빠지는 시간이다. 물품 보관소의 담당자들은 코트나 귀중품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보관해야 한다. 홀 담당자들은 (가장 중요하다.) 티켓 검수와 좌석 안내를 마친 뒤 문을 닫고 좌석 뒤에 선다. 공연이 시작되면 돌발적인 사진이나 영상 촬영을 정중히 제지하며 공연장 내 쾌적한 관람 분위기를 유지한다. 정시에 입장한 관객들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도록, 늦게 온 손님들의 입장 타이밍을 조절하기도 한다. 인터미션이 시작되면, 썰물처럼 빠져나오는 관객들에게 재입장 시간을 미리 안내하고 유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람들을 친절하게 응대하는 일은 내 적성에 잘 맞았다. 무엇보다 훌륭한 연극이며 발레, 음악 공연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메리트였다. 전혀 다른 배경으로 만난, 또래 친구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라는 것도 설레고 흥미로웠다. 어둠이 내려앉은 가을밤. 모든 교육을 마치고, 은은한 조명을 밝힌 오페라 하우스 앞을 두 줄로 걸어 탈의실로 돌아갈 때에는 그 공간에 머무는 공기마저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르바이트라고 하지만 실수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므로 군기는 엄청났다. 출석은 물론이고 교육 중 꾸벅 조는 행위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깔끔하게 망에 넣어 묶는 머리 모양이며, 신발의 굽 높이도 정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하루치 교육이 끝나면 매일 한 바닥을 꽉 채운 일지를 제출하고 돌아가야 했다.
사회생활에 가까운 이 일을 학교 생활과 병행하자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수업이 끝나는 대로, 강북의 학교에서 지하철을 타고 강남으로 넘어가야 했다. 정신없이 졸다가 지하철 문이 열리면 내려서 뛰었다. 교육이 끝나면 또 뛰었다. 지하철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한 달 간의 힘들었던 수습 기간이 끝나갈 무렵, 단 한 번의 지각으로 인해 나는 아르바이트에서 잘리고 말았다. 저녁 시간에 잡힌 전공과목의 기말고사가 교육 일정과 겹쳐버린 탓이었다.
기말고사 시험지를 휘갈기다시피 써 내고 뛰어왔는데도 이게 최선이었다고. 엉엉 울며 매달렸지만 주임님은 냉정하게 답할 뿐이었다. "OO 씨는 사범대를 다니고 있잖아요. 정해진 길이 있는데 왜 굳이 고생해요. 취업에 쓸 스펙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이쪽 일을 할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그만둬요. 그만두는 게 본인에게 맞아요."
그 날, 지하철 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며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모른다. 얼마나 서운했는지. 그 날 나는 한없이 자책했다. 짤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나는 뭐가 문제였을까. 십 수명의 동기들 중에 내가 눈에 띄게 불성실했기 때문이었을까? 매니저님이 강의를 하시던 날, 앞자리에 앉아 깜빡 졸았던 탓이었을까? 피고용자의 입장에서, 자격 미달이라는 평가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후 일 년 가까이 근무를 이어가는 동안 동기들 중 누구도 지각을 한 번 했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일은 없었다.
십 년도 더 된 이야기. 오늘 드라마를 보다가 갑자기 나를 해고한(...) 그 직원들이 불쑥 떠오른 것이다. 그저 쌀쌀맞고 차가운 어른들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들에게도 내게 그런 조언을 건네기까지의 어떤 사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때 나는 기껏해야 3학년이었다. 누군가의 들러리가 되는 인생을 꿈꾸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였다. "눈에 띄지 않는 검은 정장을 갖춰 입고" 좌석도 없이 선 채 공연을 보면서도 나는 환한 무대 위의 연주자들처럼, 사회라는 무대의 당당한 주연으로 곧 멋지게 데뷔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스물 여덟에 아이를 낳고 나는 생각지도 못한 산후 우울증에 시달렸다. 아이는 내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했지만, 고작 스물 여덟인 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나를 옥죄었던 건 아이의 존재가 아니라, 지나치게 무거웠던, 엄마라는 타이틀이었다. 서른도 안 된 젊은 날. 나는 날개가 꺾인 듯 마음껏 꿈꿀 수 없게 된 기분이었다.
아이를 돌보는 엄마라는 자기소개가 익숙해진 지금, 이제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누군가는 같은 내용을 공부하면서도 의사 가운 대신 간호사복을 입고 일한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법정에서 멋진 변론을 펼치는 대신 법원에 제출할 서류를 검토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는 대신 아이들의 입시를 돕고, 누군가는 가수로 데뷔하는 대신에 춤 선생님으로, 보컬 트레이너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글을 쓰려던 꿈을 접고 책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한 권의 책에는 작가의 이름만이 오롯이 새겨진다는 것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꿈. 늦깎이 작가로 정식 등단에 도전하리라는 꿈을 꾸기 전까지, 중고 책방의 주인은 내가 품고 있던 가장 간절하고도 현실적인 꿈이었다. 아이디어나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진지하게 내 사업에 대한 구상을 적어내려갔다. 정작 가게를 얻을 종잣돈이 한 푼도 없었기에, 이 또한 허황된 꿈일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어째서 책방 주인이었을까? 시작은 단순히, 좋아하는 책들 속에 파묻혀 생활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았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야말로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하면서도 타고난 재능을 시험받지 않아도 되는, 가장 안전한 길인 것만 같았다.
서른 넷. 늦었다면 너무 늦은 나이다. 박 과장님의 말대로라면 나는, 글쓰기는 문학을 전공하고 십 년 이상 연단해온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 밥이나 열심히 짓는 편이 나을 것이다. 여태 내 시간을 쏟아온 전문 분야라면 그것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주 잘 풀려야 책방 사장님이 되거나 끝끝내 아무것도 되지 못하는 결말.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결국 같은 결말일지라도, 이제 막 시작한 첫사랑 같은 내 꿈과 끝이 정해진 것처럼 사랑하고 싶지는 않다고, 정말이지 그렇게 생각한다.
글을 써서 생활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서른 네 살, 오늘의 내 꿈이다. 나는 후회없이 내 꿈을 아끼고 사랑할 생각이다.
열정과 재능의 불일치는 회피하기 어려운 삶의 부조리이다. 재능이 있는 일에 열정을 느끼면 제일 좋다. 그러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기만 하다면, 재능이 조금 부족해도 되는 만큼 하면서 살면 된다. 사람은 저마다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174P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늦은 나이에, 정치를 떠나 전업 작가로 살아가기를 선언한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썼다. 자신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기만 하다면,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부족한 만큼, 되는 만큼 하면서 살면 된다고. 같은 책에서 그는 '자유론'을 쓴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말도 인용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_존 스튜어트 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글쓰기로 돈도 한 푼 벌지 못한 채 삼십 대를 보내고 사십 대를 맞이하는 날이 온다면? 그렇더라도 그 시간이 후회 없는 시간이었다고, 부디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쓰기에 집중하며 몰입하는 동안 나는,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설레고 행복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존심을 버리고 매달리면서도 끝내 공연장 도우미로 일하고 싶었던 이유. 그건, 내가 하고 싶으니까.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고 싶으니까. 이 둘 중 어디가 잘못되었던 것일까? 스펙이 되지 않고,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없는 노력은 모두 쓸모없는 것일까?
나는 스물 두 살로 돌아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던 그 어른들에게, 눈물을 보이는 대신 조금은 더 또박또박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나는 정말 열심히 일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한 줄짜리 이력보다도, 나는 그냥 그 공간들이 좋았다고. 나는 그냥 마음껏 음악이 듣고 싶었다고. 고작해야 스물 몇 살. 내가 커서 무엇이 될 줄 알고 그렇게 단언할 수 있었느냐고. 나는 이렇게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는 멋진 아줌마가 되어 버렸는데 말이다.
이 의미는 유일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반드시 그 사람이 실현시켜야 하고, 또 그 사람만이 실현시킬 수 있다. (중략). 인간은 스스로의 이상과 가치를 위해 살 수 있는 존재이며, 심지어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 (중략). 인간에게는 살아야 할 의미를 주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p152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 for Meaning), 빅터 프랭클
삶의 의미를 향한 여정. 그것은 단순히 취업이나 창업의 성공으로 막을 내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우리의 삶에 최종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끝없는 이상을 향해 걷는 방향만이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삶의 의미를 찾고 실현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몫이다. 그러니까 모두가 꼭 대단한 무엇이 될 수는 없더라도, 누구든지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권리는 있는 거 아닐까? 인간에게는, 우리 모두에게는 오늘도 '살아야 할 의미를 주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