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무언가에 쫓기듯 목 끝까지 숨이 차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일로 바빴던 한 달을 보내고 체중계에 올라 보니 -3kg라는 수치가, 그간 앉은뱅이 마라톤 같았던 시간들을 대신 설명해주는 듯 하다.
몸무게가 가벼워졌다. 일주일에 운동은 하루도 가지 못하는데도 살이 빠진다는 것은 분명 좋은 신호가 아니다. 전날 대충 챙긴 도시락을 데워 허겁지겁 점심을 먹고 바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저녁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하다 밤늦게서야 퇴근하면 배가 고파도 다음날 소화가 안될 것을 걱정해 그냥 잠들었다. 그렇게 강제적인 1일 1식을 한 달간 지속하자 몸무게는 가벼워졌지만 덩달아 몸에 기운은 없어졌다. 흐느적흐느적 택시에 실려 집으로 돌아와 겨우 세수만 하고 침대에 몸을 던지던 일상이었다.
몸은 가벼워지면서도 머리는 도통 가벼워지지 않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행사의 PM으로 느끼는 압박감에 머릿속은 평일, 주말, 밤낮 할 것 없이 온통 일 생각으로 가득했다. 새벽에 침대에 누우면서도 내일 출근하자마자 해야 할 일, 팀원들에게 시켜야 할 일들을 정리하느라 한 시간을 더 뒤척이며 보냈다. 그날 회의에서 클라이언트에게 들은 싫은 소리를 다시 곱씹고 화를 삭이며 잠들었다가 꿈에서 다시 그 장면을 마주하기도 했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클라이언트 말 한마디면 다 부질없는 시간이 되고, 시간에 쫓겨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일해도 쓰이지도 않고 버려지는 무수한 창작물들을 보고 나면 밤마다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보고를 위한 보고를 하고 그걸 위해 대행사는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고, 덕분에 나의 하루는 온종일 엉망인데 그들은 퇴근 후 후련하게 맥주를 들이켜겠지. 이런 찌질하고 억울한 생각만 늘어갔다. 좋아하고 잘한다고 믿었던 일이 이런 구조 아래에서 쪼그라들다 보니 한없이 쓸데없이 느껴졌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직업정신으로 무장하고 현장의 중압감과 부담감을 기꺼이 감내하는 데에도 정신적 육체적 을이 되어야 하는 걸까.
프로젝트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예민함의 끝까지 몰려가는 스스로가 보였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거리로 만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일을 꼼꼼하게 챙기는 건 나라는 사람의 장점이기는 했지만 그쯤 되니, 걱정과 체크리스트가 자꾸 늘어나는 사태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억지로라도 남은 일주일의 시간을, 머리를 가볍게 만드는 시간으로 쓰기로 했다. 아니 쓰고 말겠다 결심했다. 그래야 남은 시간들을 무사히 넘기고 행사를 겨우 끝 마치기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아직 출근 전인 지하철에서 걸려오는 모든 전화를 무시했다. 전날 밤 온 메일이 있나 확인하고 답장하는 행동도 멈추었다. 처음에는 출근길에 쌓여 가는 부재중 통화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건 출근뒤의 나에게 맡기기로 하고 출근길 지하철에서 해오던 모든 업무를 멈추었다. 나에게 일과 일 외의 시간의 완벽한 분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출근 시간과 딱 맞을 길이의 예능 영상을 미리 골라 내내 보며 이동했다. 하루 중 그 시간만큼은 일 생각을 억지로 내려놓게 하기 위해서였다. 영상 한 편이 끝날 때쯤이면 지하철에서 내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사무실까지 빠르게 걸었다. 마음은 급하지만 달달한 커피를 한 잔 사는 여유도 꼭 빼먹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되뇌었다. 팀원들의 실수를 챙기기 위해, 클라이언트에게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한번 더 보는 책임감을 내려놓았다. 실수가 생기면 누군가 한번 더 하면 되니까. 어떤 것을 완벽하게 만드는 데 더 이상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고 눈에 보이는 잘못된 것을 보고도 넘겨보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뒤에 일어날 사고가 그려지는데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도 꽤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정말 많이 애씀으로써 스스로 머리를 가볍게 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프로젝트는 잘 마무리되었다. 열심히 준비한 덕분도 있겠지만 걱정했던 것만큼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팀원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게 보였다. 결국 또 그 말이 맞았다.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일에 대한 생각을 덜어내기 위해 출퇴근길 예능 영상을 보는 것 만큼이나 자주 들은 노래가 있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Can’t Stop Loving You’라는 곡인데 유독 이 노래를 자주 찾게 된 이유가 있는데 중학교 시절 MP3에 넣어두고 자주 들었던 노래기 때문이다.
일상과 미래에 대한 크고 어두운 고민 없이, 어른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더 큰 세상에 대한 동경만 가득하던 때. 다시 돌아가고 싶은 하루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꼽을 것 같은 그때 들었던 노래라 그런지 이 노래의 브라스 전주를 들을 때면 온 세상이 환하게 느껴져 크고 어두운 고민 같은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한 달 전 블로그에 이런 글을 썼다.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라 굳건히 믿었고 좋아하는 일이라 믿고 6년차에 접어들었지만, 갈수록 더 어렵고 부담감은 점점 커지고 겁은 많아지고 이러다 멋진 내 모습이 쪼그라들어 없어질 것 같다. 일 하다 보면 무슨 일이든 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나에게는 정말 중대한 일, 내가 사랑한 일의 존엄성을 지키고 싶다.’
얼마나 많은 회의감이 들었기에 그런 글을 썼던 것일지, 어디에 시원하게 털어놓을 사람도 없어서 거기에라도 한풀이를 해야 했던 것인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의 내가 그 글을 쓰던 당시의 나를 바라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자꾸 쪼그라들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강제적으로 출근길에 무언가 머리를 가볍게 하기 위한 행동들을 만들어냈던 몇 주전의 나에게도, 15년전 미래에 대한 순수한 동경으로 고민없이 듣던 좋은 노래들을 남겨준 과거의 나에게도 고맙다. 어쩌면 지금의 내게 가장 용기가 되고 위로가 되고 동기부여가 되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과거의 내 모습이 아닐까.
Can’t Stop Loving You.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계속 사랑해야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