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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Jul 15. 2020

꿈의 자리



"생각이 많고 스트레스받을 때는 뭘 해?"


또래의 친구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4-5년 차에 접어들자 모이기만 하면 던져지는 이야기 소재 중에 하나는 '스트레스 푸는 팁'에 관한 것이다. 얼마 전 등산 중에 친구가 물어본 질문인데 글쎄, 뭘 했더라 딱 떠오르지가 않았다. 질문을 한 친구가 다시 대답했다. "난 그냥 계속 걸어." 아, 그러고 보니 그때도 걷고 있었네요.



나 역시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걷기'이다. 나에게 '걷기'란 산책을 넘어 '운동'이 될 정도의 거리를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두세 시간은 거뜬히 걸으니 '걷기 중독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하루의 일과에 얼마나 오랫동안 걸을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 있고 그 계획에 따라 아침에 신고 나오는 신발이 달라지곤 한다. 계획에 없었더라도 대부분은 많이 걷게 되는 나날을 보내다 보니 높은 구두를 신어본 기억도 잘 없다.



걷기 좋은 날씨는 봄, 가을이라지만 나는 특히 여름의 산책을 좋아한다. 약간 습하지만 열기는 가라앉아 선선한 여름밤, 퇴근 후 걷기 위해 신발을 신으면서 플레이리스트에 적당한 노래들을 고르기 시작한다. 출발할 때부터 그날 기분과 어울리는 노래를 딱 듣게 된다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걸을 수 있을 만큼 기분이 좋기 때문에.






그날은 약속이 일찍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하철을 타면 집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경로였지만 출구를 지나쳐 쭉 걸어보기로 했다. 아쉽게도 신고 나온 신발이 걷기에 매우 불편하기는 했지만 왠지 조금 처지는 기분이 들어 무작정 걷고 싶었다. 늘 그랬듯이 노래를 듣기에 충분한 배터리를 위해 핸드폰 지도는 보지 않고, 큰 대로를 따라 초록색 표지판에 의지해 지하철 노선대로 걸었다. 첫 곡을 선곡하고 가방에 핸드폰을 집어넣자 두 손이 자유로워졌다.

시간은 저녁 8시쯤 되었고 날씨도 선선한 여름밤의 산책에 흘러나온 첫 곡은 '한 여름밤의 꿈'.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로 첫마디를 듣는 순간 영화 '클래식'의 어느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름 풍경이 그려지는 영화 속에서는 현실적이고 진지한 고민은 어울리지 않아 잠시 접어두고 걷기로 했다.



몇 주 전 일주일째 야근을 하던 무렵, 야식으로 삼각김밥을 먹다 뜬금없이 동료에게 그런 얘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는 삼각김밥이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 처음 나왔어. 까는 방법을 몰라서 다 흘리면서도 싸고 맛있으니까 맨날 학원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랑 나와서 이걸 사 먹고 그랬지."

삼각김밥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뜬금없이 이상한 곳으로 이어졌다.

"학교 끝나면 친구들이랑 아무 생각 없이 학원에 몰려가서 왜 하는지 모를 공부를 하고 그랬어. 공부하러 간다기보다는 쉬는 시간에 이런 거나 사 먹고 노는 게 재밌어서. 근데 우리 엄마 아빠는 나를 학원에 보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을까? 어쩌면 지금 내가 이렇게 일하는 것보다는 더 잘되어 있기를 바랐을 텐데. 그리고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으로 공부를 했을까? 내가 되고 싶던 어른은 지금의 이런 정도의 모습이었을까?"


요즘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나름대로 잘 살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지금보다 더 꿈 많고 욕심 많던 어린 내가 공부하며 바라던 모습이 지금 이 모습이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물론 그때는 아무것도 몰라도 꿈꿀 수 있는 때니까, 20대 후반이 되면 운전쯤은 한 손으로 할 줄 알았고 내 힘으로 마련한 (자가) 집에는 언니와 내가 각각 쓸 수 있는 옷방 두 개는 있을 줄 알았다. 어딘지 정확히는 몰라도 미국에 있는 어느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줄 알았다. 하하. 스무 살이 되어 상경한 시골소녀는 조금 더 현실을 깨달은 척했지만 그래도 몇 년쯤 더 지나면 더 잘 나가고 대단해져 있을 줄 알았다. 사소한 것 하나에 기분이 하늘을 찍었다가 바닥을 찍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건 둘째치고 스스로 기분을 컨트롤하는 것도 여전히 쉽지 않은 어른이가 되어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과거의 나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노래를 들으며 한강을 따라 걷다 보니 처음 서울에 오던 그해가 생각이 났다. 무서운 것 하나 없이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부푼 마음을 안고서 상경한 스무 살 새내기는 처음 만난 서울이 신기해 여기저기 참 열심히 돌아다녔다. 여름이면 한강을 닳도록 드나들었다. 강이 없는 도시에서 자라 그런지 여름밤이면 사람들이 잠들지 못하고 강가에 나와 맥주를 마시고 노래를 듣는 모습이 설레도록 좋았다. 여름밤, 그리고 한강. 두 가지 기억을 조합하면 지금도 쌓고 만들어 온 많은 기억들이 따라온다.


상경한 이래로 몇 년 동안 한강 근처에 살았던 우리 자매는 저녁에 자주 한강을 뛰었다. 그때마다 강 건너편에 세워진 높은 건물들과 불빛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저 건물 꼭대기에서 일하고 있는 날이 올까?"라는 얘기를 종종 하곤 했다. 당시 취미로 만화를 그렸던 언니는 우리의 대화 내용을 담은 '꿈의 자리'라는 만화를 그리며 몇 년 뒤 그 건물 꼭대기에서 강 건너편에서 그곳을 바라보던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직장인의 모습을 가장 마지막 컷에 담았다.




2013년 팡툰 '꿈의 자리' 中


최근 오랜만에 언니와 함께 우리가 좋아하는 한강을 찾았다. 한강을 걸으며 강 건너편을 바라보던 나는 "옛날에는 저렇게 밤에도 화려하게 빛나는 높은 건물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알겠어. 이 시간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걸."이라고 얘기했다.

그때 같이 건너편을 바라보던 언니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서 바라보는 건물들 꼭대기에 지금 내가 일하는 사무실이 있었네."





어린 내가 바라보던 꿈의 자리에 우리는 이미 도달해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러니 더 멋지게 살아와주지 못해 어린 나에게 그리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무려 7년 전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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