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니 Jun 24. 2023

차곡차곡 쌓아온 나의 일상이 누군가의 꿈이 된다

오랜만에 보내는 혼자의 주말, 알림이 울렸다. 모르는 사람에게 메일 한 통이 왔다. 간결한 제목은 ‘보니님’. 블로그를 하다 보니 광고성 협찬 제안 메일이 자주 오는데 요즘은 형태도 다양해서 당연히 그런 거겠지 하고 메일을 열었더니 긴 장문의 편지가 있었다. 내 블로그를 구독하고 있는 이십 대 중반의 한 직장인이라고 서두를 시작하는 글이었다.


블로그에 일과 관련된 기록들을 거의 8년 넘게 써오기 시작하면서 최근 몇 년 들어 일과 관련된, 즉 내가 하고 있는 행사기획, 컨벤션 기획에 관련된 검색어 유입이 늘었다. 일 방문자 수가 높지도 않은데 왜 유입이 되는고 했더니 실제로 ‘행사기획’과 관련된 정보를 찾기 위해 검색을 하면 기록이 있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 일을 시작하던 2010년대 초반에도 이 직업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는데 10년이 지난 요즘에도 딱히 정보를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턴 시절부터 매 행사마다 기록을 남겨온 내 블로그로 정보를 갈망하는 행사기획자 꿈나무들이 유입이 되는 것이었다.


메일을 보낸 그도 그렇게 내 블로그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반복되는 업무에 매너리즘이 오고 이게 내가 청춘을 보내야 하는 일인가 하는 회의감이 밀려오면서 새로운 일을 찾고 싶었는데 그러다 알게 된 일과 관련해서 유일무이하게 기록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 어디 다른 곳에 물어볼 데도 없어 용기를 내 연락을 했다는 것이었다. 종종 포스팅이나 유튜브를 보고 메일이나 댓글로 질문을 보내오는 분들은 있어왔고 그럴 때면 성심성의껏 그 장문의 질문보다 더 장문의 답변을 함으로써, 궁금해해 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 메일에서는 단순히 질문이 아닌, 자신에게 30분이라도 시간을 내어줄 수 있겠냐는 얘기가 적혀있었다.


[바쁜 와중에 모르는 사람에게 시간을 내어 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메일 드리니 부담 없이 거절하셔도 늘 응원하겠습니다.]


나는 메일을 끝까지 읽은 뒤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좋아요. 어디서 볼까요?]





그렇게 일주일 뒤 회사 근처의 와인바로 그를 만나러 갔다. 최근 몇 년은 온라인으로 직무강의도 계속 해왔었기에 일에 관심이 있는 분들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라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괜스레 설레는 기분까지 들었다. 나와 내 일을 궁금해해주는 사람과의 만남이라니? 마치 인터뷰를 요청받은 작가라도 된 기분으로 퇴근 후 와인바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너무 신나는 나머지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 가게를 들어서자,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왠지 그 분일 것 같은 분이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쳐다보고 “혹시…”하고 씩 웃으니 “맞는 것 같아요!” 하고 그도 웃으며 반겨주었다.


“일찍 오셨네요?” 하고 묻자 오후 네시부터 회사 휴가를 내고 출발했다는 그는 충북에서 왔다고 했다. 당연히 서울일 거라고 생각하고 평일 저녁에 약속을 잡았던 나는 깜짝 놀랐다. 한 편으로는 얼마나 절실했으면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러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와인 한 병을 시켜놓고 일에 관한 질문을 이것저것 하는 그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내가 해주는 이야기보다 그의 답답한 마음을 들어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해서 말을 많이 아꼈다. 그는 아직 20대 중반의 어린 나이였지만 늘 언니, 오빠들이 해주던 말처럼 “그땐 뭐든 다 할 수 있는 나이지~” 라든가 “벌써 그런 걱정을 해, 그냥 도전해!”같은 말을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그 나이의 나도 분명 아직 어리고 가능성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스스로의 속도에서는 여전히 느린 것 같고, 스스로의 방향에서도 여전히 갈피를 못 잡은 것 같아 불안하고 조급했었기에 먼저 다 겪어본 사람들이 한층 여유를 가지고 하는 말들이 잘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와인을 한두 잔 마시다 보니 어느새 낯선 사람이라는 생각보다는 언니, 동생으로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진짜 메일에 답장을 해주실 줄 몰랐어요. 워낙 바쁘신 것 같아서. 그런데 저보다 더 빨리 답장을 하시는 거예요!”라며 킥킥 웃었다. 그를 만난 이 자리에서 나는 이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고등학생 시절, 당시에는 생소했던 파티플래너라는 직업을 처음 알게 되었다. 서울도 아니고 지방 어느 시골의 고등학생이었으니 그 직업이 얼마나 멋져 보이고 동경의 대상이었을 것인가. 영화에서나 보던 파티를 직접 만들어내는 직업이라니! 언니와 나는 둘 다 파티플래너가 될 거라며 친구들과 소소한 파티도 기획해 보고 꿈을 키워 가곤 했었다. 고3이 되고 진로에 대한 고민이 눈앞으로 다가왔을 때쯤 집에서 뒤통수가 큰 컴퓨터 앞에 앉아 ‘파티플래너’라는 직업을 검색했을 때 그 직업에 종사하는 어떤 분의 포스팅을 보았다. 검색해도 정보량이 많지 않을 때라 어쩌다 발견한 그분의 기록이 얼마나 큰 수확같이 느껴졌는지 모른다.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냥 무턱대고 그분에게 메일을 보냈다. (내가 보냈는지 언니가 보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고등학생의 질문이라 꽤나 두서없고 뭐라 답변해야 할지 모를 추상적인 질문들이었던 것 같다. 아니 질문이라기보다는 나의 고민을 두서없이 나열했을 것이다.

메일을 보내면서도 절대 답장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뒤 그분에게 답장을 받은 것이다. 시골의 10대 소녀에게 그 메일은 엄청난 이벤트였다. 내 메일을 읽고 답장까지 해주시다니. 우리나라에 유일무이한 파티플래너님이!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실제 그 일을 하고 계신 분과의 대화는 꿈을 더 선명하게 그릴 수 있게 해 주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를 해주면서 덧붙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분은 그냥 어떤 행사 기획 회사의 5년 차쯤 되는 직장인일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저처럼. 여느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클라이언트와 상사에게 시달리면서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가 갑자기 꿈 넘치는 고등학생의 편지를 받은 거죠. 저는 그분이 우리나라의 유일무이한 파티플래너인 줄 알았는데.”

“제가 바로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저는 절대 내 메일에 답장을 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답장을 해주신 거예요. 그런데 제가 그 입장이 되어보니 당연히 그랬을 거라 생각해요. 오히려 누군가가 나를 궁금해해 주는 게 고맙고 단조롭던 일상의 에피소드 같은 거였을 테니까.”

“그분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지네요.”

“맞아요. 저도요.”



두 시간이 훌쩍 지났고 그는 내 눈치를 보며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것 같다고 그만 일어나자고 했다. 재밌었는데.. 오히려 내가 더 아쉬운 마음으로 일어나 계산을 하려는데 그가 자신이 사야 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좀 어른 같은 목소리로 “원래 더 많이 버는 사람이 사는 거예요~”라고 머쓱한 얘기를 했다.

지하철 역 앞에서 헤어지며 그가 이름을 물었고 나는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우와, 명함 기갈나다!”

“더 기갈난 명함 가지세요. 나중에!”


헤어지고 뒤돌아서 걷는 발자국에 경쾌함이 실렸다. 누군가는 나로 인해 고민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답을 얻었을 테고 나는 관심과 감사를 받았다. 나이 드는 게 이런 이유로 정말 나쁘지 않다고 기분 좋은 금요일 퇴근길에 생각했다. 고등학생의 메일에 고심하며 답변을 보냈던 그분도 메일 보내기 버튼을 누르며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지금은 어디에서 뭘 하고 계실까.




 (230624)

이전 13화 꿈의 자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