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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Mar 02. 2021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불안’이었다


세상에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애써 피해온 것들이 있다. 어느 순간 나보다 키가 작아진 아빠를 보면서도 그는 언제나 슈퍼맨일 것이고 늙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 재수강을 해도 C학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제학 과목을 보고 경제는 ‘나랑은 맞지 않아’라며 주식을 비롯한 금융 상품을 더 깊게 공부하려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내가 불안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언제나 누가 보기에도 잘 사는 사람이었다. 음, 정정하겠다. 언제나 나는 그런 사람으로 보일 거라 생각했다. 하고 싶은 건 바로 시도했고 원하는 수준의 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고 박수와 응원도 받았으니 말이다. “넌 참 재밌게 산다”라는 말은 늘 따라붙는 수식어 같았다.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새로운 계획으로 짜여진 해를 지나오며 나를 변화무쌍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서 트레이닝해왔다. 그래서 MBTI니 EQ검사니 다중지능 검사니 하는, 온라인에 널린 심리검사를 할 때는 거리낌 없이 했다. 결과는 항상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즐겁게 사는 유형, 남들과 트러블 없이 아주 잘 지내는 유형]일 테니. 어김없이 받아 든 결과를 보고 그럴 줄 알았다며 만족스러운 고개를 끄덕이곤 말았다.






얼마 전 우연히 심리 검사를 하는 곳에 들를 일이 생겼다. 내 의지는 아니었고 남자 친구가 미리 예약해놓은 데이트 코스 중 하나였다. 복작거리는 홍대와 어울리지 않는 밋밋한 건물의 2층에 있는 카페 입구에서 ‘왠지 이런 거 싫은데, 그냥 갈래?’라고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가 보자는 남자 친구에 이끌려 테이블에 앉았다. 몇 가지 검사를 하고 무의식 테스트를 진행했다.


“그림을 보면 뭐가 보이세요?”

“음.... 앉아있는 사람을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날개 달린 악마요.”

“이건 뭘로 보이세요?”

“드레스를 입었는데 망토가 찢어진 여왕이요.”

“이건요?”

“화산으로 이루어진 바위산 위에 있는 탑이요.”


대답을 하면서도 일관되게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첫 번째 그림부터 ‘나비’, ‘단풍잎’, ‘하이파이브를 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던 남자 친구에 비교해서도 말이다.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니 솔직하게 대답해도 된다지만 내가 너무 솔직했나.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매우 높다고 나오네요. 그렇기 때문에 누구와 함께 무얼 하더라도 만족할 만한 성취감을 느끼기가 힘든 거예요. 겉으로 그래 보이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아 보이고 본인도 그렇게 알고 있겠지만 사실은 내면에서 오는 불안이 매우 높네요.”







‘불안’은 ‘심심해’와 마찬가지로 내가 거의 쓰지 않는 단어였다. 심심하다고 말하는 것과 불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단어 같이 느껴졌다. 사실 심심할 수도 있고 불안할 수도 있는 건데.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면 정말로 매일 심심하고 불안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 단어를 말하지 않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이젠 자연스럽게 머릿속 단어장에서도 사라졌다.


그런 단어를 전문가의 입에서 검증된 연구결과에 따라 받아 들었을 때 나는 ‘불안’해졌다. 선생님, 저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불안이 높은 건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다만 불안에 의해서 남들과 비교해서 더 높은 곳만을 좇다 보면 언젠가 한계가 오게 되고 공허하고 무력해질 겁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무언가 하나 더 얻는 게 아닌, 스스로 혼자서 느끼는 성취를 얻어보려 해 보세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날 집에 와서 해본 ‘성인애착 유형 검사’에서도 나는 높은 불안과 회피 성향을 가진 ‘공포 회피형’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다시 한번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지 모르지만 하루에 ‘불안’ 2COMBO를 맞고 나니 내면의 ‘불안’을 더 이상 회피할 수만은 없었다.





‘불안’을 더 이상 회피하지 않기로 하고 마주한 순간부터 과거의 모든 경험들을 끄집어내어 내가 ‘불안한 아이’가 되던 순간의 조각을 찾았다. 가족에 대한 유난스러운 애정, 거기에서 파생된 사랑하는 부모님을 만족시키고 싶었던 마음에 늘 지니고 있었던 모종의 부담감, 어딜 가든 유별나게 튀었던 탓에 자신을 자꾸 더 특별한 사람으로 포장하면서도 포장 속 나는 그렇게 특별하진 않은 것 같다 여기던 시간 등.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듯이 그런 시간들을 거치며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으로 트레이닝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https://youtu.be/8O1IZjuk4ew



그런데 ‘불안’을 마주하고 보니 ‘불안’은 부정적이기만 한 감정이 아니었다. ‘불안’은 이상과 현실의 지속적인 충돌이고 이성과 감성의 충돌이기도 하다. 그만큼 ‘불안’은 감정의 결여 또는 그와 반대로 과도한 경우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시도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자주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불안에 대해 이야기한 프로이트도, 자아가 미성숙하고 약한 유아기-아동기에 나타나는 ‘자동적 불안’보다 심리 방어 구조가 성숙된 이후에 일어나는 ‘신호 불안’이 더 자주 발견되는 불안의 종류라고 말했다. ‘신호 불안’은 과도할 경우에는 불안 경험을 통제할 수 없게 되어 공황상태와 같이 심각한 현상을 나타내지만 적절한 경우에는 오히려 특정한 위험 상황에 더 잘 대처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유명한 건축가 유현준은 이야기했다. “내 성취는 불안이 만든 것”이라고. 물론 그분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나와는 좀 다른 종류의 불안(자신감이 없고 잘 되지 않을 거라는)이고 그것을 극복해내려 노력한 것이 성취로 이어졌다는 스토리에서 나온 문장이지만. 나에게 ‘불안’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마다 어스름하게 올라오는 감정이었고 그걸 극복하려다 보니 자꾸 새로운 것을 하고자 했고 넘어서려 했던 것이었다.


언제나 과도한 것은 좋지 않다. 당연히 ‘불안’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그날 기준으로 새로 세운 목표는 내면의 ‘불안’을 낮추고 ‘안정형’으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돌이켜보면 이 불안이 지금껏 스스로를 트레이닝하는 데 있어 꼭 필요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https://youtu.be/_md16sTcnPM


백예린의 'square' 영상의 아름다움도 그녀에게서 보이는 ‘불안’에 있다. 이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는 너무나 아름답지만 노래를 떡상하게 해 준 백예린의 이 라이브 영상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보였다. 노래를 하는 그녀는 언제나 매우 행복해 보이지만 평소의 그녀가 쓰는 글, 가사, 찍는 사진 등을 보면 머릿속에 얼마나 큰 생각의 블랙홀이 펼쳐져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게 지금의 그녀를 노래하게 만든 원동력일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불안한 우리여. 이제 그와 피하지 말고 마주 해보는 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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