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간 준비해온 행사를 마치고, 행사를 준비했던 팀원들과 또 파트너로 함께했던 분들까지 다 같이 둘러앉아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행사가 다가오던 최근 몇 주간 모두 새벽까지 일하며 동고동락해왔기에 함께 마시는 술도 달고 지난 에피소드들을 나누는 것도 매우 즐거웠다. 대화가 깊어가던 중 갑자기 다른 회사의 책임님이 나에게 물었다.
"과장님은 취미가 뭐예요?"
예전 같으면 당황하거나 대답할 뭔가를 생각해내려 애썼을 테지만 요즘의 나는 스스로를 잘 아는 편이다. 나는 딱히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저는 사실 취미가 없는 사람인 것 같아요. 원래는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이것저것 해보곤 했는데, 빨리 지루해지는 편이라 오래가지도 않고요. 더군다나 요즘에는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안 생기더라고요. 취미는 그걸 할 때 몰입해서 다른 건 잊고 시간을 보낼 수 있거나 하는 걸 말하는 거잖아요. 저는 그런 게 없어요."
일이 많아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다른데 관심사를 돌리기 위해 취미를 가져보려고 시도하기는 했지만 딱히 효과가 있었던 게 없어 결국 '취미가 없는 상태'라고 생각해오는 요즘이었다.
"과장님은 일이 취미 아니에요?"
질문을 했던 책임님이 다시 물었다. 이번 질문에는 솔직히 좀 당황했다. '아, 그런가요?'라고 대답해야 할지 그건 아니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절대 아니라고 하기에는 '진짜 그런가?' 싶은 마음도 들었기 때문이다.
"일이 취미라고요? 어우. 그러면 너무 힘들죠."
옆에 있던 선임님이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하면서 대답을 했다. 그때 책임님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왜요? 일이 취미인 사람도 있을 수도 있죠. 일하실 때 엄청 몰입해서 하시잖아요. 전 그것도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날 술을 꽤 마시고 새벽녘 사람이 없는 도심의 거리를 걸으며 바쁜 일을 마무리한 후의 개운함을 담뿍 느꼈다. 몇 달만에 느껴보는 마음의 홀가분함이었다. 그때 문득 다시 그 질문이 떠올랐다. "과장님은 일이 취미 아니에요?"
사실 누가 봐도 일에 빠져 살고 있었던 몇 개월이었다. 단지 이번뿐만이 아니라 행사가 다가오는 시즌이 되면 으레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무언가를 할 엄두도 못 내고 일에만 빠져 있곤 한다. 내가 일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일이 '취미'까지 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정말 인생에 낭만도 여유도 없는 사람이 될까 봐서. 그런데 부인해오던 사실을 누가 짚어주고 나니 어쩌면 나는 취미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미
1)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예. 취미 생활)
2)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예. 취미를 기르다)
3)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 (예. 수학에 취미가 있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내가 일을 취미라고 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의미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일로 돈을 벌고 있으니 전문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고, 일을 아름다운 대상에 비유하려니 오늘도 근무 중 전화를 끊자마자 욕을 시원하게 내뱉었으니 말이다. 저 날 이후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취미가 일인 사람일까?"에 대해 묻곤 했고 물으면서 사실은 아니기를 바라기도 했다. 내게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이 있는 다른 대상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나에게 일만큼 몰입하고 있고 성취와 즐거움을 느끼는 무언가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등산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일, 매일 음악을 듣고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들도 하면 즐거운 것들이다. 사전적 의미의 취미(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에 더 가깝기도 하다. 그래도 내가 느끼는 취미를 정의하는 또 다른 요소는 '몰입'이다. 그걸 할 때 푹 빠져서 즐겁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야구를 보는 게 취미라 야구 시즌이 돌아오기 시작하면 설레기 시작하고, 누군가는 와인을 마시는 게 취미라 종류별로 와인을 사모으기도 하고 누군가는 새로 나온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기도 한다. 예전부터 나는 그렇게 무언가에 푹 빠지는 이들을 보면 부러웠다. 성격상 무언가에 오래 빠져있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흥미가 생겨해 보다가도 금세 다른데 관심이 생기고 또 어느 정도 하고 나면 질려 버렸다. 무언가를 푹 빠져서 하지 않아도 즐기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취미'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나에게 푹 빠지는 것, 즉 '몰입'의 정도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강도와 비례해서 느껴졌다. 그런 내가 어느새 8년 차 같은 일을 해오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 일은 나에게 몰입의 강도가 가장 높은 취미였다.
나만큼이나 '워커홀릭'인 남자 친구와 해지는 남산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중 이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그분이 나한테 일이 취미가 아니겠냐고 하시는 거야. 근데 나도 모르게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인정하게 되더라. 일이 취미라고 하니 너무 팍팍한 인생 같기도 한데 말이지."
잔디밭에 드러누워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나를 보던 남자 친구는 말했다.
"있잖아. 작년에 내가 한 분야에서 20년~30년씩 근무하신 실장님들이랑 같이 워크숍을 갔었는데 말이야. 그들 중에 중년 가수가 한 분 계셨는데 나보고 취미가 뭐냐고 묻더라고. 그랬더니 옆에 있던 실장님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는 거야."
"뭘 물어. 우리는 취미가 일이지."
대답을 하신 그 실장님은 평소 기타를 매우 잘 치시고 즐겨 연주하시는 분이었기에 남자 친구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실장님, 기타 연주하시는 것 좋아하시면서 그게 취미 아니에요?"
음향 시스템 업계에서 30년째 일하고 계신 그 실장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인마. 내가 하루에 10시간을 일하고 나머지 10시간을 잔단 말이야. 기타는 고작 한 달에 몇 번 치는데 그걸 취미라고 할 수 있겠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그게 성장해가는 걸 보면서 즐거우면 그게 취미인 거지."
처음에 질문을 던졌던 중년의 가수도 옆에서 거들었다.
"나는 노래가 좋아서 가수를 한 거고, 이 형은 노래 듣고 장비 만지는 게 재밌어서 음향 회사를 차린 거야. 우리는 다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사람들이고 일이 취미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