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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Oct 12. 2022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


7일 동안의 행사를 끝냈다. 7일 중 5일이 비가 내렸던 야외 페스티벌. 행사 기획자로서 가장 피할 수 없지만 피하고 싶은 것이 변동성인데 야외 행사에 날씨까지 궂었으니 참으로 울고 싶은 일주일이었다.


한국 문화와 관련된 행사라 전국의 소상공인들이 전시 입점 업체로 참가하였다. 전통 매듭, 한복, 전등 등 공예 제품을 비롯해 오란다, 간장게장 같은 전통 한국 음식들을 가지고 참여한 업체들도 있었다. 그런데 행사가 시작하자마자 연이틀 비가 내리 왔으니. 야외 행사였던 만큼 갖고 온 물건들이 젖기도 하고 바람에 엉망진창이 되기도 했다.


참가 사들은 대부분 소상공인이어서 생업을 접어두고 며칠 전부터 물건을 만들어서 일주일 간의 행사를 위해 나와 계셨다. 그런데 날이 계속 흐리고 비가 오다 보니 참가자들도 이런 날 굳이 야외 행사에 발길을 할 리가 없었다. 행사에 참가자가 없는 것이 단지 내 탓만은 아니었지만 PM으로서 사장님들 얼굴 뵐 면목이 없어 며칠간 전시부스 앞으로 지나다니지도 못하고 멀리 빙 둘러 갈 수밖에 없었다. 전시부스로 모객 할 수 있는 방안들을 이것저것 고민해봤지만 그런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심심하면 일기 예보를 보기 좋게 빗나가며 비가 내렸다.


행사 시작 후 나흘째 되던 날 역시 비가 내렸다. 참다못했는지 하나 둘 전시 참가 업체에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대게 속상한 마음을 감추고 하소연을 하시다 "담당자님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라고 하셨지만 그중에는 화를 내는 분도 계셨다. 몇 달간 준비한 행사에 사람이 없어 속상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분들은 생업도 접고 오셨는데 오죽하실까 싶어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무성의하다며 주최기관에 항의를 하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며칠 연속 하늘만 흐리면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 '오늘 또 비가 오면 어떻게 하실 거냐'며 따졌다. 비가 내리는걸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긴 행사 기간에 체력적으로 지치니 억울하고 짜증도 났다.



그날 저녁에 참가사 중 한 대표님의 전화가 왔다. 행사장에 나와 계시면 만나서 얘기를 하고 싶다고 사무국으로 찾아오겠다고 하셨다. 먼저 달려온 직원이 말하길, 지금 그분이 화가 많이 나신 것 같다고 했다. 나보다 키가 머리 두 개쯤 더 큰 장발의 대표님이 사무국에 도착하자 분위기에 압도되어 버렸다. 하지만 며칠간 나름의 훈련이 되어 있어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분과 책상에 마주 앉았다.

"담당자님.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어떨 것 같으세요? 저희 그냥 오늘 철수해도 되나요?"

눈을 부릅뜨고 묻는 그에게,

"며칠 동안 날씨도 너무 안 좋았고 제대로 방안도 못 마련해드린 것 같아서 제가 드릴 말씀은 없는데요. 저희가 이런 이런 방안을 마련해봤으니 들어보시고 고려할 만하시면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켜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라고 단단하게 말하려는 내 목소리와는 다르게 몸은 떨렸다. 며칠간 스트레스를 받았더니 한기가 들고 기운이 없었다.

대표님은 꽤 강경하게 더 이상 전시 부스를 지킬 이유가 없으면 철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참 얘기를 하며 멍해진 머리로 이젠 모르겠다, 하고 싶으면 그러라고 해야겠다 싶을 때쯤 대표님이 손을 내밀었다.


"저희는 끝까지 남아서 자리 지켜 드릴게요. 좋은 퍼포먼스 안 나더라고 다음에 또 하면 되니 기운 내시고요."


내민 손에 악수를 하며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까지도 피로감에 별 생각이 들진 않았다. 행사 마지막 날이 되었고 마흔 개 가까이 되는 전시 부스들 중 절반이 거의 다 철수를 했다. 빈 부스를 남겨놓고 떠나신 뒤 고생하셨다고 고맙다고 메일로 답변만이 남겨져 있었다. 어쨌거나 끝이 나니 그제야 긴장했던 몸에 힘이 풀렸다. 지잉. 문자가 왔다. [담당자님,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 의리 지켰습니다!]


아, 그제야 그 대표님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다. 대표님 뿐 아니라 하루하루 아까운 인건비와 시간을 써가면서 추운 날씨에 참가자도 없는 행사장을 지켜준 참가사들에게도 고마웠다. 아쉽고 속상하면서도 담당자는 얼마나 더 힘들겠냐며 토닥여주던 대표님들의 모습도 그제야 다시 떠올랐다. 

늘 힘들 땐 사방이 막힌 듯 내가 힘든 것만 보이지만 조금만 둘러보면 자신보다 남을 더 먼저 생각하며 제자리를 지키는 고마운 사람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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