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일찍 찾아왔다. 벚꽃도 예년보다 개화시기가 빨라져서 올해 벚꽃축제에는 지는 꽃이 더 많았다는 후문. 나무 심기 좋은 시기로 지정된 식목일도 지구온난화로 따뜻해지는 시기가 앞당겨져 이젠 날짜를 조정해야 한다는 글도 보았다.
'봄'은 곧 '설레는 계절'이라는 고정관념이 오랫동안 자리 잡아온 덕인지 봄만 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봄노래들의 멜로디만 들어도 설렘 세포들이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노래를 듣는데 갑자기 벚꽃이 날리고 봄바람이 불기라도 하는 날엔 후렴구쯤에 팔을 양쪽으로 쭉 벌리고 눈을 감은채 사뿐사뿐 걷고 싶어 지기도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사실 나는 올해 봄이 그다지 기다려지지 않았다. 봄이 오고 날이 따뜻해지면 마음이 들뜨고 근거 없이 낙관적인 생각이 펼쳐지는 게 왠지 싫었다. 왜냐하면 올해에도 나는 어김없이 이 끝나지 않은 바이러스에 맞선 채 시작한 지 2년을 맞은 작은 회사를 지켜보려 발버둥을 치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이번 봄을 맞이하는 마음엔 설렘보다 걱정이 더 가득했다.
날이 좋은 봄, 가을을 맞아 우후죽순 피어나는 행사들의 대향연을 맞이하기 위해 행사 기획자들은 녹지도 않은 땅에 씨앗을 뿌리듯 연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제안서를 쓰고 영업도 하고 수주도 하면서 말이다.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밤을 새우며 제안서를 완성하고 나면 피곤하긴 해도 잘 키운 농작물을 수확해낸 듯 뿌듯해진다. 입찰 시장에 뛰어들어 경쟁을 하고 결과를 받아 들고 나면 많은 기획사들의 희비가 교차한다. 올해 초 우리 회사는 겨우내 열심히 뿌린 씨앗에 비해 수확은 없이 다소 허전한 두 손으로 봄을 맞이했다.
온 열정을 쏟아부으며 한 달 동안 썼던 제안서가 허무하게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날, 퇴근길 늘 듣던 노래도 듣고 싶지 않아 소리가 안 나오는 이어폰을 꽂은 채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 집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이런 기분이라면 어떤 것도 다시 시작할 의욕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붙고 떨어지는 건 하늘의 뜻이라 좋지 않은 결과는 훌훌 털어버리고 팔을 걷어붙이고 다음 일을 다시 준비해야 하는데, 도무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 출근해서 팀원들에게 안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시무룩해질 그들에게 다시 파이팅을 불어넣으며 나지도 않는 힘이 나는 척하는 것도 싫었다. 배도 고프지 않고 잠도 오지 않았다. 눈 앞에 걸려있는 달력은 곧 4월의 시작을 알렸고 어느새 1분기가 훌쩍 지나가는 걸 보니 덜컥 겁까지 났다. 봄이 오는 게 이렇게 무섭고 싫었던 적이 있었던가. 수십 번도 더 붙고 떨어지며 겪은 과정인데 뭐 별거라고 이번에는 이렇게나 마음이 헛헛한 걸까.
소파에 앉아 있는 중에 갑자기 드라마나 볼까 싶었다. 원래 나는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데, 워낙 감정이입을 잘하는 탓에 드라마를 보고 나면 그 세상에 한참 동안이나 빠져있는 게 싫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몰아 보느라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시간이 흐르는 것도 싫어서 성인이 된 이후로는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피하다시피 했기에 전 국민이 난리 난 드라마 중에도 본 게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순간 문득 드라마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는데 자발적 의지로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을 때 드라마만 한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남들 다 즐기는 인생의 즐거움 중에 하나인데 왜 나만 일부러 피해 다닐까 하며 넷플릭스에서 추천해준 한 편을 재생했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주인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소하고, 또 소소하지 않은 이야기들. 눈웃음이 예쁜 동백이와 순박하고 정의로운 용식이가 사는 곳. 그들 사이에서 옥신각신 펼쳐지는 에피소드를 들여다보는 내 눈에 가장 많이 보였던 건,
'칭찬'
칭찬 폭격기가 되어버린 용식이와 '태어나서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다.'라는 속마음과 다르게 '잘 참고 있는데 왜 칭찬을 해서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냐'며 우는 동백이. 동백이는 그 뒤로 용식이의 칭찬 폭격을 받으며 무럭무럭 용감하게 내면의 자신을 자라게 한다.
헛헛한 나에게 필요한 건 ‘칭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큰 회사에서 독립을 하고 작은 회사를 시작했을 때, 내가 걱정했던 것도 ‘칭찬’의 결핍이었다.
함께 고생한 팀원들 간에 나누는 ‘고생했어, 잘했네, 수고했어’도 좋지만 가끔은 상사들과 선배들에게 듣는 ‘쟤 참 잘한다’는 칭찬과 인정이 고팠다. 다들 저마다의 최대 역량으로 달리고 있고 잘해주고 있는 걸 알았어도 어쩌면 무의식 중에 그걸 당연하게만 여겼던 것 같다.
나의 열정과 노력도 그랬을 터였다. 가끔은 별거 아닌 거에도 입을 쩍 벌리며 박수를 쳐주기를 바랐는데 다들 바빠서, 저마다 시무룩한 마음을 추스르느라 서로 진심 어린 칭찬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정신없이 달려온 게 좀 속상해졌다.
바라는 것 없이 칭찬을 솥째로 퍼부어주던 용식이를 보며 ‘누가 안 알아줘도 잘 참고 있었는데 왜 별거 아닌 거에도 칭찬을 그렇게 해주냐’고 동백이가 되어 마음속으로 이야기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식이는 계속 얘기했다. “아유, 누가 이걸 이렇게 혼자 척척 해내유. 대단한 거지유. 아주 따라올 사람이 없다니께유.”
‘동백꽃 필 무렵’의 ost인 ‘이상한 사람’을 봄이 오는 내내 들었다. 출근길에 듣고 퇴근길에 또 듣고, 출근해서도 들었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걸으면 용식이의 칭찬 보따리를 가득 짊어지고 씩씩하게 걷는 동백이가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후렴구가 나올 때는 양 팔을 펼치고 걷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드라마 기피자인 나는 새로운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봄이 이렇게 설렜나.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