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에 졸업을 하자마자 매료되어 뛰어들었던 '국제회의 기획자(PCO)'라는 직업은 일 년 중 3/4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하고 1/4는 현장에서 행사 실행을 위해 뛰어다니는 것으로 근무 환경을 구분할 수 있겠다. 국내외에서 모여드는 참가자들을 관리하고 그들이 참가하는 며칠간의 행사가 안전하게 잘 굴러가도록 매뉴얼을 만들고 매뉴얼대로 현장 운영이 이루어질 수 있게 만드는 일. 그래서 기획과 운영, 사무직과 현장직을 겸업해야 하는 일. 업계에 발을 디딜 무렵의 나는 오랜 시간 공들여 행사를 기획하고 그 결과물을 현장에서 확인하는 과정이 '기-승-전-결'이 확실하다는 점, 그리고 생소하지만 보람있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이 길에 매료되었다.
초보 기획자 시절, 나의 성향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현장에서 발에 불이 나게 뛰어다니는 점이 참 잘 맞다고 생각했다. 비록 행사 기간 중에 잠은 두 시간도 못 잘 때가 많고 돌발 상황이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몰라 심장이 조마조마해도 말이다. 현장에서 마주치는 행사 참가자들의 즐겁고 행복한 표정과 감사, 준비했던 모든 일정이 무사히 끝났을 때의 뿌듯함과 벅참 등 현장이 주는 감동이 초보 기획자에게는 너무나도 큰 일 적 보람이었기 때문이다. 일 년에 많게는 네 번, 적게는 한 두 번 정도의 현장을 다녀오고 나면 한 뼘 더 성장하는 기분도 들었고 올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보냈느냐를 판가름하는 척도로써 스스로 남겨보는 행사의 후기를 활용하기도 했다.
현장이 즐겁기 때문에 '이 직업은 천직이야'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는 지금 생각하기에도 덤덤하고 겁이 없었다.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결국에는 잘 해결될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행사의 성공 여부는 주최기관인 '클라이언트의 만족도'보다 '참가자의 만족도'에 비례했다. 행사의 주인공은 주최 기관이 아니라 참가자니까. 참가한 사람들이 기뻐하고 만족하고 돌아가면 그것으로 행사는 성공적이었던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8년 차에 접어든 지금, 나는 현장이 무섭다. 이 증상이 발동한지는 사실 일 년이 조금 넘었다. 조직 내에서 중간 직급이 되면서 행사의 프로젝트 매니저(PM)를 맡기도 하고 한 파트에서 책임자를 맡게 되면서 느끼는 부담감과 책임감이 나를 짓눌러왔기 때문일 테다.
엄청난 행사 후유증을 가져다주었던 재작년 첫 총괄을 맡은 행사 이후, 행사의 성공 기준을 판단하는 척도는 '참가자의 만족도'에서 '클라이언트의 만족도'로 옮겨 갔다. 그 이유인 즉슨 현장에서 클라이언트의 분노 가득한 표정을 하루에 열댓 번은 마주했기 때문이다. 5일의 행사 중 첫날부터 크고 작은 사고들이 뻥뻥 터져버렸으니 내가 클라이언트라도 열이 받을만했다. 첫날 클라이언트에게 소집 당해 나대신 면책을 듣던 팀장님을 본 뒤 조용히 비상계단으로 피해 창가 너머로 터지는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그날의 기억을 삭제해버렸다.
그 이후로도 행사 내내 돌발 상황은 수도 없이 일어났고 사흘 차에는 순도 99%의 진심으로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간신히 붙잡은 책임감 한 올 덕분에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며 겨우 행사의 마지막 날까지 왔지만 마지막 날마저 불행은 피해가지 않았다. 사고를 인식한 순간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봤을 때 보이던 클라이언트의 모습은, 비록 조명에 의한 역광으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가끔 꿈에도 나오는 그 표정은, 참담했다.
현장이 즐겁던 기획자의 인생에 대단히 큰 물음표를 찍었던 그 행사 이후로 현장이 다가오기도 전에 무서워지는 고질병이 생겼다. 지난 몇 년간 국제행사에서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던 짧은 영어에도 현장에서 즐기며 잘 해결해나가던 열정 넘치는 초보 기획자였던 내가, 행사를 6개월이나 남겨놓은 시점에서도 현장을 머릿속에 그리면 겁부터 났다. 그때의 강렬한 물음표는 그이후로도 이렇게 묻고 있었다.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주제에 즐기겠다고? 웃기지 말게나"
"저도 3년 차부터는 현장이 마냥 즐겁지 않았는걸요. 늘 행사 중에는 걱정돼서 잠을 제대로 못 잤던 것 같은데. 근데 참 아쉽다. 그렇게 즐거울 때가 좋았는데."
경력이 곧 20년 가까이 접어드는 대표님도 공감하는 기획자의 숙명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두려워하기보다는 즐겁게 일하고 싶다. 현장에서 클라이언트의 표정이 아닌 참가자들의 표정에 조금 더 주목하고 싶고 주눅 들지 않고 마지막까지 잘 해내고 당당하게 박수치고 싶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클라이언트의 표정을 신경 쓸 필요도 없을 만큼 완벽한 준비와 실행이 동반되어야 하지만, 어디 그게 마음처럼 쉬운 거라면 지금까지도 현장은 나에게 즐겁기만 한 것일 테지.
성장하는 과정은 즐겁지만 성장통은 늘 얼마나 아플지 무섭다. 이번엔 또 얼마나 아플까, 이걸 겪어내고 나면 나는 좀 더 클까. 큰 후의 내 모습은 전보다 더 만족스러울까. 이 같은 상황이 또 와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정도는 클까. 나는 그 과정 속에서 꼰대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일에 있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말자, 이성적으로 굴자'하고 다짐한채로 출근했지만 다가오는 현장에 대해 미리 발발해버린 두려움 때문에 이성적이기를 실패한 오늘의 경험에서 나온 생각이다. 올해가 지나고 내년이 되면 8년 차의 이 고민은 그저 조그마한 투정에 불과했다고 느낄 수 있을까. 내년에는 한 두 계단 위에 올라서서 지금의 나를 내려다보며 '그때는 그랬지'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확신할 수 있는 건 10년 차의 기획자가 되어도 행사 전 날에는 밤잠을 설칠 것이라는 사실이지만.
(20.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