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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Apr 07. 2021

온순한 환자가 되는 이유




 퇴원하고 일주일 뒤, 수술 후 조직검사결과를 들으러 다시 방문한 병원에서 사뭇 달라진 분위기를 느꼈다. 원래도 친절한 간호사들이었지만 그날은 유독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자기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어휴, OOO님...’ 하고 말끝을 흐리는 것이다. 세상 딱하다는 표정도 약속이나 한 듯 같았다. 반쯤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어 차례를 기다렸다. 내 순서가 되었음을 알리러 나온 간호사도 내 팔을 꼭 붙들고 부축하며 같은 말을 했다.


- 아이고, OOO님. 전 진짜 이런 경우는 처음 봐요.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담당 의사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가득 쌓인 종이들을 차례로 넘겼다.


- OOO님. 아주우 안 좋은 케이스였어요. 이 병원 생긴 이래 최악의 경우였어. 말하자면 심장 빼고는 나머지 장기 모두에서 자궁내막증이 발견되었다고 보면 돼...


 복막을 비롯한 장기들에서 빠짐없이 자궁내막증 조직이 발견되어서 보이는 부분은 다 긁어냈고, 장기 유착도 심해 수술 시간이 말도 안 되게 길어졌고, 그 와중에 대장이 유착된 부분은 천공 가능성이 있어 일부는 떼어내지 못했고, 정맥류는 클립 폐쇄술로 막았다는 것. 모니터를 함께 들여다보며 꼼꼼하게 수술 과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사실 모니터에 띄워진 내 몸 속 사진은 이리보고 저리봐도 명란젓 덩어리들 같아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도, 나는 짐짓 이해한 것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파악할 수 있는 건 수술 후 왜 그리 몸 전체가 아팠는지와, 그동안의 생리통이 왜 그런 식이었는지였다. 심장을 제외한 모든 장기에서 자궁내막증을 긁어냈으니, 전체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생리 때마다 온 장기가 자궁과 함께 수축하는 것 같은 통증도, 유착이 심했으니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모니터와는 별개로 머릿속에서 몸 안에 벌어졌던 일들이 영화처럼 그려졌다. 여러 곳에 번진 자궁내막증을 제거하는 장면이 쉽게 떠오르지 않아, 중학교 때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기 위해 길 곳곳의 껌을 떼던 기억을 떠올렸다. 말캉말캉한 붉은 길에 엎드려 날카롭고 판판한 도구로 얼룩지고 울퉁불퉁한 곳들을 끄트머리부터 살살 긁어낸다. 바닥이 일렁거려 영 쉽지 않다. 한 손으로 바닥을 지그시 짚어가며 조금씩만 긁는다. 고개를 들어보면 이런 곳이 사방에 널려 있어 언제 끝날지 아득해지기만 한다. 


 장기 유착 부분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달라붙은 물풍선 두 개를 터뜨리지 않고 떼어내느라 진땀을 흘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조금만 긴장이 풀리면 풍선은 힘없이 찢어지고 말 것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멋대로 상상하고 나니 조금 더 설명이 와 닿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생리통으로 정신을 놓을 지경이 될 때에도 그런 상상들을 했던 것 같다. 장기들이 딱딱하게 움직이지 않고 굳은 상태로 자궁이 수축할 때마다 하나의 덩어리처럼 자궁 쪽으로 끌려오는 상상.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을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내 눈으로 볼 수 없고, 보여준다 해도 내가 아는 영역의 지식이 아니라 알아볼 수가 없다. 어릴 때부터 다져온 쓸데없는 상상력은 이런 때 유용하게 쓰였다.






 재발 방지를 위해 6개월 동안 한 달에 한 번 씩 주사를 맞아야 했다. 로렐린 데포라는 이 주사는 인위적으로 폐경 상태를 만들어준다고 했다. 생리를 하면 결국 내막증이 재발하기 쉬운 상태가 되므로, 6개월 동안 그것을 막는 것이다. 주사를 맞는 6개월 동안은 갱년기와 비슷한 우울감이나 열이 확 오르는 증상 등의 부작용을 겪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내 관심사는 오로지 6개월 동안 생리를 안 한다는 데에 쏠려 있었다. 


 꽤나 아프게 배에 주사를 맞고서도 싱글벙글했다. 여행을 가야겠다. 생리 주기에 신경을 안 써도 되니 조금 길게. 아니면 남편이 출장 갈 때 함께 따라가서 요양할 겸 호텔에서 쭉 지내야겠다. 다음 주사 날짜 안에만 돌아오면 되니까 최대 한 달은 있을 수 있는 거네. 미뤄뒀던 친구들과의 약속도 실컷 잡아야지. 계획이 줄을 섰다.


 무방비로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아랫배가 싸하더니 생리가 시작됐다. 부랴부랴 검색을 해보니 간혹 이 주사의 부작용으로 부정출혈을 겪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루 이틀 그러다 말겠지, 하고 마음을 편히 먹었으나 아무리 봐도 ‘부정’ 자를 붙일 정도의 출혈이 아니었다. 생리와 똑같이 7일이 지속되었고 굳이 따지자면 양도 더 많았다. 아리송한 마음으로 다음 번 주사를 맞으러 갔을 때 물었다. 


- 저 이거 맞고도 생리 했어요. 심지어 양은 더 많았어요. 이것도 그냥 부작용인가요?


 내 뱃살을 한 움큼 쥐고 주사실 선생님이 대답했다.


- 부작용으로 그러시는 분들이 있어요. 한 번 그러다 말기도 하고 주사 맞는 내내 생리가 안 없어지시는 분들도 있어요.


 아니, 그러면. 생리를 멎게 해서 재발을 방지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 아닌가. 머릿속이 뒤죽박죽에 거대한 물음표까지 생겨났지만 그대로 입 밖으로 내어 묻지는 않았다. 뭔가 큰 뜻이 있겠지. 그런 부작용이 있음에도 재발 방지는 되는 거니까 6개월 내내 맞게 하는 거겠지. 그날 배 주변으로 퍼지는 주사약은 짜증스럽게 아팠다.


 다음 달에도, 그 다음 달에도 생리는 오차없이 찾아왔고 경증의 생리통을 함께 데려왔다. 심지어 생리통은 회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진통제로 가라앉을 정도였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많았다. 부작용치고는 아예 약이 기능을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제 때 찾아오는 생리도 그렇고, 수술 후 말끔해진 몸에서도 생리통이 생기는 것이 의아하기만 했다. 나는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모든 것을 다 의사에게 질문할 수는 없고, 성의 있는 답변을 듣는다 해도 그 중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선택하는 건, 꼭 이건 알아야겠다 하는 질문만 간추려서 하고 최대한 의사에게 믿음과 신뢰의 눈빛을 보내는 환자가 되는 것이다. 미진한 구석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면 안전한 범위 내에서 치료를 받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어린 시절 선생님의 눈 밖에 나지 않는 좋은 학생이 되려던 노력을, 의사 앞에서마저 좋은 환자가 되기 위해 반복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결국 내 상상력이 할 일로 돌아간다. 주사약이 들어가고도 생리를 하는 과정을 최대한 납득이 가도록 그려본다. 어렵다. 자궁 주변이 캡슐로 싸여있어 주사약이 침투를 하지 못한다? 그럴 리 없다. 


 그래서 결국 또다시 검색창을 연다. 이 곳에는 나처럼 의사 앞에서 백 가지 질문을 늘어놓지 않는 온순한 환자들이 도토리 같은 경험담과 지식을 공유하며 서로를 위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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