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찹쌀부꾸미 Apr 07. 2021

아이를 가지기로 했다




 2019년 늦겨울에 조카가 태어났다. 노을이 선명하게 짙은 날이었다. 한강을 건너는 버스 안에서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며 나중에 조카가 크면 ‘너 태어나는 날 노을이 진짜 빨갰어.’ 라고 말해줘야지 생각했었다. 


 내 동생은 손에 꼽는 모범학생이었다. 그 애가 밟아온 모든 길은 어느 어른의 심기도 건드린 적이 없었다. 학교 다니는 내내 공부를 왜 해야 되는 거지? 왜 늦게 들어오면 안 되는 거지? 끝없이 ‘왜’를 달고 살았던 나완 달랐다. 국영수가 중요하다니 국영수를 열심히 했고, 다른 데 눈 돌리는 건 대학에 가서 해도 된다는 말에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가졌고, 적절한 시기에 좋은 남자를 만나, 적절한 시기에 아기를 가졌다.


 별 탈 없이 사는 나지만, 동생에 비하면 내 삶은 어른들이 보기에 지적할 부분으로 가득했던 모양이다. 얌전히 공부해야 할 시기에 미술을 하겠다며 나동그라졌고, 그나마 그걸로 성공했으면 모르겠는데 딱히 업적을 세우지 못했고 (이렇게 엉뚱한 글을 쓰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느지막이 결혼을 하고, 잘 맞는 남편과 쿵짝거리고 노느라 아이는 뒷전이 되어버렸다. 그 모든 게 한 소리씩 들을 원인이 되어주었다. 정말로 어떤 어른에게서는 ‘둘이 너무 사이가 좋으면 아이가 안 들어서는 거야.’라는 충고를 가장한 괴담까지 들었으니...


 조카가 태어나고 눈을 제대로 맞추기 시작했을 무렵, 엄마는 ‘이모, 안아주세요 할까?’ 하며 은근슬쩍 나에게 아기를 안겼다. 처음 안아본 아기는 내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뜨거웠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조금 빨개졌는데, 품속의 낯선 생명체의 무게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아기를 안기고 내 반응이 어떤가 가만히 살펴보는 엄마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른은 항상 그렇게 판단하고 싶어 한다. 쟤가 엄마가 될 때가 다가온 건지, 아닌지. 나는 두어 번 아기를 둥실거리며 어른 뒤 재빨리 동생에게 넘겼다.






 부모가 되어도 좋을 적절한 시기에 대해 콕 집어 답안을 내밀어줄 사람이 있을까. 

- 30대 중반이 좋지. (보편적 인생 사이클에 연연하는 타입)

- 신혼생활 2년 즐기고 나서 갖는 게 딱 좋아. (사랑의 유효기간을 믿는 타입)

-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준비가 된 다음에 가져야지. (자녀 하나를 키우는 데 4억이 든다는 기사를 본 타입)

- 멋모를 때 가져야 돼. (아는 게 병이라는 타입)

- 애가 예뻐보이기 시작하면 가져도 되는 거야. (초콜릿이 먹고 싶어지면 몸이 그걸 필요로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타입)


 아이가 있는 사람 수 만큼이나 숱한 의견을 들었다. 그들은 묻지 않아도 나에게 아이가 없음을 확인하면 자판기처럼 그 시기에 대한 조언을 던진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것은 아니어서 남편과 나도 이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고심했다. 나는 ‘아이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잘 살 자신 있다.’라고 열린 마음을 내비쳤으나, 속내는 결정 권한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싶은 거였다. 남편은 ‘그래도 아이 하나는 있으면 좋겠다.’라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온전히 내 의지로 아기 천사를 꼭 갖고 싶다고 주장할 만큼 격렬히 갖고 싶었던 적은 안타깝게도 없다. 


 부모가 된다는 건 둘의 의지로 만들어낸 한 인간이 성인이 될 때까지의 전 과정에 책임을 지는 일이다. 멋모르고 가졌든, 철저히 계산해서 가졌든 어떻게 키울 것인지에 대해 큰 그림은 그려놔야 한다. 그 탐구의 일환으로 내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 중 나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데 한 세월이 지나갔고, 그로 인해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내 모습을 다듬느라 또 한 세월이 지나갔다. 그러고도 엄마가 된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릴 때마다, 매 순간 아이에게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또 세월이 지나갔다. 자궁이 이 지경이 되어 임신 확률이 희박해질 때까지 아이를 갖는 게 늦어진 변명을 해보자면 그렇다. 






 아이를 가져도 되겠다는 신호는 아주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어느 날부터인가 잠시라도 마주친 아이들에게 자꾸만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달리기를 잘 하냐고 묻지 말고 좋아하냐고 물어볼 걸. 예쁘다 칭찬하지 말고 근사하다 말해줄 걸. 좀 더 따뜻한 눈빛을 보내줄 걸. 내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가 이 작은 아이의 생각에 영향을 끼치진 않을지, 그 아이 부모의 교육관에 반하는 것은 아닐지. 그런 우려와 아쉬움이 남는 순간이 잦아졌다. 


 사실 아쉬움보다 확신에 찼을 때야말로 아이를 가져도 될 때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단호한 훈육법이나 경쟁심을 부추기지 않는 언사,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따뜻한 어른의 존재감. 이런 덕목들이 갖춰지고 나야 부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차 없이 멀기만 한 덕목들에 나는 아직 아니야, 때가 되지 않았어 하고 미루기만 했던 마음이 어느 날 순식간에 긍정적인 신호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부모의 자격은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내 손으로 키워 본 어린 생명이라고는 강아지뿐이라 완벽히 빗댈 수는 없겠지만, 강아지의 눈빛을 읽을 수 있고 생활 패턴을 맞춰갈 수 있고 이웃집 꼬마를 물지 않는 점잖은 강아지로 키울 수 있는 건 좌충우돌 초보견주인 시절을 거쳐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밤새 낑낑거리고 소파 밑단을 물어뜯고 100군데에 오줌을 싸갈기는 귀여운 어린 생명을 두고 하루하루 고민했었다. 좋은 견주가 되기 위해 말 한마디를 고르고 행동 하나를 고민하는 동안 강아지는 꽤나 잘 성장했다. 어엿한 내 가족이 된 것이다. 


 아이를 가져도 되는 적절한 시기는 누가 말하든 그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멋모르는 20대 초반에 가지든, 달콤한 신혼이 늘어지기 시작할 무렵 가지든, 아이가 예뻐보일 때 가지든. 내가 책임져야 하는 생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키울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 때가 맞다.


 완벽한 부모는 없다. 간혹 부모로서의 노력도 고민도 하지 않는 끔찍한 사례들을 접하곤 하지만 범죄자에 해당하는 그들을 제외하면 많은 부모들이 애쓰고 고민한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뒤엉켜 산다. 그렇기에 서로의 빈틈을 찾아 사랑도 하고 성장도 한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이 이루는 하모니가 아름답게 이어지며 마음을 울린다. 아이를 가지든 가지지 않든 늘 우리는 완벽할 수 없으며, 동시에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나는 부모가 되는 경험을 하기로 선택했다. 선택한다고 해서 뜻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법은 없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끝없는 고민을 할 것이다. 아이에 대해, 아이와 연결된 나에 대해, 우리와 연결된 세상에 대해, 세상과 연결된 행복에 대해.






이전 16화 하노이 감금 생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