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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Apr 07. 2021

하노이 감금 생활




 재발 방지를 위한 주사를 5차까지 맞고 나서, 하노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 년의 반 정도를 하노이에서 출장 생활을 하는 남편을 따라가 한 달 동안만 호텔에서 푹 쉬며 지낼 요량이었다. 레지던스 형태의 호텔에서는 매일 청소와 설거지까지 하우스키퍼가 해결해주기 때문에 한량처럼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빈둥거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보다 좋은 요양은 없었다. 원래도 큰 힘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잘한 집안일에서 벗어나는 건 큰 이점이었다. 이전에도 종종 1-2주 정도는 그렇게 머무르곤 했지만 이번에는 한 달을 채우기로 했으니 꽤 긴 기간인 셈이었다.


 하노이에 갈 때마다 친구들의 부러움이 쏟아졌다. 청소와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것만으로도 결혼한 친구들에게는 꽤 자극이 되었던 모양이다. 난 수영을 못해서 수영장 이용도 못 해. 빨래는 정해진 개수 외에는 직접 해야 되고. 괜히 이런 영양가도 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나를 마냥 팔자 늘어진 인간으로만 보지 않기를 원했다. 팔자 늘어진 인간으로 보여도 별 탈은 없는데 내 마음은 꼭 그렇게 한 번씩 촌스럽게 불안함을 드러낸다.


 하노이로 떠날 때쯤은 중국에서 코로나가 처음 발병한 지 두어 달 정도 지난 후였다. 발병자 수가 아직 뉴스 귀퉁이에 자리 잡고 실시간으로 개개인의 판단력을 요하고 있었다. 검사 건수 자체가 적었던 건지 모르겠으나 상대적으로 베트남은 아직까지는 공식적으로는 청정지역이나 다름없었고, 그 중에서도 방역이 잘 되는 호텔 안에서만 머무는 생활이라 꽤나 안심하고 있었다. 






 계획했던 대로 한량 생활을 만끽했다. 이른 아침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9시까지 충분히 자고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샐러드를 먹었다. 커피를 마시며 글을 조금 쓰다 보면 하우스키퍼가 문을 두드린다. 청소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로비에 내려가 글을 마저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한 시간 정도 뒤 깨끗해진 방으로 돌아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짐에 다시 내려간다. 운동도 쉬엄쉬엄 늘어지게 한다. 한 시간 반 정도. 복작복작한 시간대를 피해 가면 항상 나뿐이다. 복작복작한 시간대라 해도 한국에서의 헬스장처럼 붐비는 일은 없다. 다시 대강 샤워를 하고 그 때부터는 간식을 먹으며 책을 읽는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 시간 즈음엔 창가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드라마를 보듯 일몰을 챙겨본다. 퇴근길에 오른 남편과 저녁 메뉴를 메시지로 상의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외식을 하거나 간단한 요리를 해 먹고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 욕조에 20분 정도 몸을 담그고 잔다. 읊고 보니 너무나 팔자가 늘어져서 괜한 죄책감에 조카 하나를 돌보느라 온 몸을 던지며 매달려 있는 엄마와 동생에게는 자세한 생활에 대해 얘기하지도 않았다.


 몸은 분명히 차근차근 회복되고 있었다. 수술 이전과 완벽하게 같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강도로 운동도 가능했다. 생리통은 수술 이전의 20%정도로 아팠다. 첫 날 몸살과 함께 열이 나며 배가 아팠고 약을 먹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다음 날엔 회복되는 정도였다. 가져간 타이레놀로 버틸 만했다.


 그 와중에 남편의 출장이 연장되었다.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돈 쓸 일도 거의 없고 생활이 편했던 터라 우리는 함께 한 달을 더 머무는 것으로 했다. 병원에 전화를 해 마지막 6차 주사를 못 맞을 것 같은데 큰 지장이 없을지 물어봤다. 


- 원래 6차까지는 맞으셔야 하는데 상황이 그러시면 5차까지만 하는 걸로 하죠. 


내 입장에서도 조금 석연치 않았지만 어차피 몸은 많이 회복되었으니 크게 상관은 없을 거라고 멋대로 결론지었다. 



 안온한 생활이 계속되는 동안 코로나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졌다. 국내 발병자수도 많이 늘었고, 베트남은 공산국가라 해외의 상황이 극으로 치닫자 강력한 통제를 시작했다. 급기야 한국에서 출발해 하노이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를 되돌려 보내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하노이 내에서도 확진자가 생길 때마다 락다운을 실시하고 상황에 따라 기간을 연장했다.


 원래도 나다니는 체질도 아니었거니와 호텔에서의 무료한 생활이 딱 맞았던지라 딱히 괴로운 부분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호텔 짐이 폐쇄되고 즐겨가던 레스토랑들도 배달만 가능해지자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조금씩 누리던 바깥 활동마저 제약이 걸리자 갑자기 너무 많은 부분을 잃게 된 느낌이 되어버린 것이다. 급한 대로 거실에 샤워 타월을 깔고 유튜브를 보며 요가를 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하늘길은 완전히 막혀버렸다. 우리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에 갇혔다. 한 달만 더 있으려던 욕심이 화를 불렀나 싶을 정도였다.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고, 1달 관광비자로 왔던 나는 비싼 돈을 주고 비자 연장을 하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떠오른 또 하나의 문제는 진통제였다. 한국에서 넉넉히 가져간 타이레놀은 몇 알 남지 않았다. 몸이 견뎌내는 진통제라고는 타이레놀밖에 없는데 베트남 약국에서는 타이레놀을 팔지 의문이었다. 언제까지 베트남에 갇혀있을지 모르니 같은 성분의 약이 있는지 찾아봐야 했다.


 매연 자욱한 길을 몇 개 가로질러 도달한 첫 번째 약국은 약사가 안쪽에 드러누워 있었다. 말 그대로 누운 채 나를 보며 뭘 찾느냐고(아마도) 물었다. 핸드폰으로 타이레놀 사진을 찾아 아세트아미노펜이라고 성분명이 명시된 부분을 확대해서 보여주었다. 억지로 일어난 약사는 한참 찡그린 얼굴로 사진을 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없어서 내젓는지 모르겠어서 내젓는지... 이곳에서 이런 답답한 상황을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어서 더 묻지도 않고 다음 약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금 더 떨어진 약국엔 젊은 남자약사가 있었다. 아까와 같은 사진을 내밀자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고, 번역 앱에 ‘생리통’이라는 단어를 돌려 베트남어로 보여주었다. 약사가 끄덕끄덕하며 내민 약은 핑크색 비닐에 싸인 메페남산성분의 약이었다. 나는 생리통이 있으면 소화력이 떨어져서 공복에도 먹을 수 있는 약이 필요하다- 라는 말을 과연 번역기가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일단 시도는 했다. 알아볼 수 없는 잔뜩 긴 문장이 나왔는데 약사가 한참을 갸우뚱하며 들여다보는걸 보니 야무지게 전달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지. 약사는 어쨌든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의 약은 없다고 했고 나는 결국 처음 듣는 성분의 약을 받아 돌아왔다. 


 우리는 한 달 분량의 짐으로 거의 반년을 버텼다. 몇 벌 되지 않는 옷을 돌려 입다보니 얇은 것은 나달나달해졌다. 본의 아니게 미니멀 라이프를 체험하게 되고 딱히 불편함을 느낀 부분은 없었지만, 한정적이었던 타이레놀만큼은 아쉬웠다.


 가장 아파서 소화가 안 되는 날에는 타이레놀을 먹고, 조금 나아지면 요거트를 먹은 뒤 사온 진통제를 먹었다. 불안한 마음에 되도록이면 타이레놀을 먹지 않고 아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남편은 옷장 안 금고 속에 타이레놀을 고이 넣어두는 나를 보고, 누가 보면 신종 마약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며 놀렸다. 나는 일부러 자기 전 손을 덜덜 떨며 금고를 열어 타이레놀이 잘 있는지 확인하는 퍼포먼스로 화답했다. 


 반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승객 명단에 겨우 둘의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된 날, 그렇게 떨며 지킨 타이레놀은 단 한 알 남아 있었다. 하노이에 갇힌 것도 타이레놀을 구할 수 없었던 것도 내게는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변수였다. 정말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생기는구나. 말이 통하는 것은 서로뿐인 타국에서 우리는 매일 저녁 이런 얘기를 했다.


 며칠 뒤 매연이 유난했던 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니 두통이 심했다. 하나 남은 타이레놀을 먹을까 금고 앞에서 한참 고민했지만 결국 먹지 않았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일찍 자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언제든 변수에 대해 생각해야한다는 걸 제대로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쯤 우연히 뭘 검색하다 알게 된 사실은, 하노이의 한인이 모여 사는 지역에 한국인이 하는 약국이 있으며 한국에서 보던 어지간한 약은 다 있다는 것이었다. 하, 참... 변수에 대비하기 이전에 검색부터 꼼꼼히 해봐야 한다는 걸 더 제대로 배웠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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