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하라(Yusuhara, 梼原)_2
2001년 영화 '친구'의 바람이 불었다. 800만 관중이 찾았던 이 영화는 2003년 '실미도'가 천만 관중 시대를 열기 전까지 최고 흥행작이었다. 그 인기의 여세를 몰아 주연이었던 유오성은 갖가지 패러디의 산실이 될 광고를 찍게 된다. 모 증권사 광고였다.
「 모두가 '예'라고 할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친구 그 친구가 좋다. 'yes'도 'no'도 소신있게~ 」
직장인 이라면 한 번은 입에 담아 봤을 이 광고로 한 때 즐거웠다. 그때 우리는 그럴 만한 용자가 아니었기에 더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급여가 높았던 대기업은 선망의 직종이었고 다른 계급의 계층으로 분류되어 당시 신종 '마담 뚜'였던 결혼 정보회사에서의 대우도 달랐다고 한다.
일본 건축계에 유오성(?)과 같은 삐딱한 존재가 1990년 건축사무소를 개설한다.
구마겐코의 대학원 시절 안도는 '스미요시주택(1976년)'으로 스타덤에 편승한다. 80년대 접어 들면서 일본은 안도다다오의 열광에 빠져들었고, 건축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된 안도의 영향 덕분에 당시 건축과를 졸업하면 모두들 아뜰리에 형식의 건축설계사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였을까 구마겐코는 주류에 휩쓸려 다같이 떠내려가는 모습이 과연 옳은 것인지 좋은 것인지 의문을 가진다. 역시 삐딱하다.
그리고 주류 건축계에서 행해지고 있던 콘크리트 일색의 디자인 형태들이 너무 관념적으로만 일편향 되어 있는 것 또한 싫었다.
그런 그가 선택한 것은 토다건축설계부(戸田建設設計部)였다. 그곳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즉물적이고 비관념적인 건축을 구축해 나갔다.
그런 그에게도 1990년대는 녹녹치 않았다. 기회도 많지 않았고, 모더니즘의 관념을 내려놓고 새로운 객관적 관점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건축사무소 개설부터 초기 작업인 군마현의 Lakewood Golf Club(1996년)까지는 모더니즘의 답습에 가깝다.
하지만 곧 극복하고 같은 해 모리무대(森舞台_Noh Stage in the Forest)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는 재료와 구법의 사용을 자연에서 그리고 고전적인 전통 건축의 탐구에서 찾았다.
유스하라정청사(梼原町役場,2006), 구름 위의 호텔 별관(雲の上のホテル別館,2010), 구름 위의 갤러리(雲の上のギャラリー,2010) 이전, 구마겐코는 1994년에 구름 위의 호텔(雲の上のホテル_1994)을 유스하라에서 개관한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젊은 구마겐코의 작업은 현재의 작업과 많은 차이가 있다. 이전 작업 그리고 이후 작업 어디에도 쓰여지지 않았던 유선형이 나타난다. 비행기 날개의 단면처럼 생긴 3개의 지붕이 철재 기둥과 강선의 도움을 받아 비중력적 형태로 떠 있다. 그 아래 유리 간막이는 다른 어떤 간섭도 없이 빛이 유입 된다. 구조를 노출 하고 힘의 방향을 숨기려 하지 않으면서 관념적 부분을 지워간다. 당시 경향과도 달랐고 지금의 구마겐코의 재료, 디자인과도 동떨어지지만 구마겐코의 건축 개념을 시각화하고 객관화 되고 있는 과정의 작업이다.
아마도 구마겐코의 고전에 대한 탐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목교뮤지엄(木橋ミュージアム)인 「구름 위의 갤러리(雲の上のギャラリー,2010)」다.
구마겐코는 목교뮤지엄에서 고전의 형태인 하네하시(분교,刎橋)를 차용하여 변형적인 모델을 만들었다. 고전에서는 없었던 교각을 교량의 중심부에 위치 시켰고, 접성된 스기목(삼목)을 벽돌처럼 쌓아 단면적을 축소 할 수 있었다. 그는 이것을 가르켜 '나무조적'이라 하였다. 이후 이러한 나무조적 형태의 구조는 구마겐코의 건축에서 구조체로 나타나기도 하고 의장적인 형태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네하시(はねはし,刎橋)는 일본 전통 가교 형태다. 암반벽에 굴착하여 나무를 꽂아 공중으로 돌출 시켜 한켜씩 내밀어 쌓아 올린 구조형태다. 교량의 중간부에 교각을 만들지 않고 가교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없으나 복원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구름 위의 갤러리에서 차용한 구조형식은 중국의 15세기 후반 교량 형태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을 두고 중국 것이라고, 아니면 표절이라고 할 이유는 없다. 스기목(삼목)의 주산지였던 중국과 일본에서 비슷한 시기에 나타났던 구조형식이고, 어느 쪽에서 전파되었는지도 관심 밖이다.
구마겐코는 새로운 것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다. 오래전에 있었던 옛 표현을 자신의 작업에 복원하여 사용하였고, 집성재를 이용하여 조적 형태로 쌓는 방식은 기존의 축조 형태와는 다른 구체성과 추상성을 부여하였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모더니즘에서 잃어 버렸던 일본의 객관성, 다시 말해 일본적인 것에 접근하는 구마겐코의 방식이다.
비오는 도원(梼原)에서 만난 도원(桃源)의 어부 구마겐코(隈研吾)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몇 해전 프리츠커상(pritzker prize) 수상자로 조용히 점쳐 보기도 했지만 아직 수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나 수상권에 근접해 있는 유력 후보다.
이제 마지막 목적지, 하나의 건물만 남겨놓고 있다.
빗길 속 고속도로를 한시간 반가량 달려 숙박 때문에 그냥 지나쳐 왔던 고치시(高知市)로 간다. 이 곳에는 나홀로 집짓기 끝판왕, 킹왕짱, 사와다맨션(澤田マンション)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