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변덕스럽고 때론 사랑스러운

호주, 멜버른

by 여행작가 Q

1. 50달러 비행기표를 허공에 버렸던 여행


어쩌다, 멜버른 여행이었다. 멜버른 여행은 애들레이드에 도착한 후 이틀 만에 결정된 여행이었다. 여행일이 다가오기 전까지 애들레이드에서 최선을 다해 일상을 보내다가, 여행을 앞두고 또 한 번 새로운 기대감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홈스테이 가족에게 멜버른 여행을 떠날 거라고 말했을 때, 랍 아저씨는 다정하게 멜버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장 강조해서 이야기한 부분은 날씨였다. 멜버른에선 하루에 사계절 날씨를 만나게 될 거라고 말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변화무쌍한 날씨를 만날 거라고 했는데, 그 날씨를 둘째 날 떠난 그레이트 오션 로드 투어에서 만나게 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멜버른에서 갈 수 있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Great Ocean Road)'는 해석하면 '멋진 해안 길'이다.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떠난다기보다, 그 '길'을 따라 직진으로 쭉 달리는 여행! 그럼에도 돌아오는 지점이 있으니 그곳을 최종 목적지라고 한다면, 바로 '12 사도(Twelve Apostles)'라는 대자연이었다. 얼마나 길이 멋지면 그 길 자체가 꼭 떠나야 하는 여행이 되었을까. 꼬박 한나절이 소요되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 투어는 우리의 2박 3일 멜버른 여행의 핵심이라 해도 괜찮았다.


아침 일찍 숙소를 떠나는 길부터 청량한 공기가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운전사 아저씨가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은 손에 꼽을 정도라며 우리에게 운이 좋다고 할 정도로 날씨 요정이 함께 한 드라이브 시작이었다. 하늘이 맑았고 바람이 덜 불고 공기가 깨끗했다. 중간에 멈춰 내려 나무에 있는 야생 코알라를 올려다볼 때는 내리쬐는 햇빛에 눈이 부셔 제대로 위를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좋았던 날씨가 최종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벌써 저녁이 되었나' 하고 시계를 봐야 할 정도로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비가 쏟아질까 봐 조마조마해진 마음을 안고 후다닥 챙겨 온 카디건을 입고 차에서 내렸다. 그랬더니 우리를 반겨준 것은 바로, 선글라스 없이 걸을 수 없는 세찬 바람이었다. 바닷바람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거칠었다. 그렇지만 젊은 우리는 그 바람을 온몸으로 뚫고 가서 그곳의 풍경을 후회 없이 보았다. 풍경은 자연이 빚어낸 장관이었다. 바람만 거셌지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시내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쓰러지듯 잠을 잤다.


숙소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하루를 잘 마무리했다,라고 끝나는 게 평범한 마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하루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그날 밤 숙소에서 저녁을 먹은 후, 동갑내기인 Y와 나는 다음 날 애들레이드로 돌아가는 50불 비행기표를 멜버른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럽게 포기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에서 바람을 잘못 맞았던가? 이유는 단순했다. '하루'만 더 머물렀다 가면 이 여행이 더 멋질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었다. 비행기표를 하루 미루면 가장 쉽지만, 제일 저렴한 비행기를 선택한 우리에게 무료 일정 변경은 언감생심이었다. 차라리 표를 다시 사는 게 나았다. 그렇게 고작 하루를 위해서지만 그 하루를 위해 50불을 썼다. 그만큼의 여행을 더 알차게 보내기로 다짐하며 패기와 무모함을 안고 여행 중 최고 낭비를 했다. 솔직히, 지금의 나라면 그렇게 쉽게 비행기표를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또 그럴 수 있는 시간도 부족할 것이다. 그런데 그땐 그랬다. 여행 중 이성보다 감성에 이끌려 고작 '하루'를 위해, 2박 3일을 3박 4일로 만들기 위해 비행기표를 버렸던 내 인생 최대의 낭비는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만, 그럴 수 있었던 그때가 아주 조금은 그립다.




2. 거리에서 만나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


멜버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의외로 소소한 거리의 풍경에서 왔다. 대자연을 봤던 그레이트 오션 로드 투어나 발을 쭉 빼고 대롱대롱 난간에 앉아 탔던 기차의 단데농 투어도 훌륭했지만, 더 기억에 남는 순간은 도심 속 햇살 좋은 잔디밭에 삼삼오오 모여 누워서 책을 읽거나 이야기 나누는 그들을 보는 것이었다. 은빛의 고층 빌딩을 보는 것만큼 뾰족뾰족 첨탑 같은 성당이나 키 큰 시계탑을 보는 것이 왜인지 나에겐 더 큰 설렘을 주었다. 그리 높지 않은 트램 줄,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만나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청년,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풍경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밖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어느 포르투갈 음식점에서의 이국적인 식사, 호주 마트에서 구매한 진한 초콜릿 아이스크림, 재미있는 얼굴 모양의 고소한 파이 등이 미각을 자극했다. 입구를 바로 찾을 수 없을 만큼 강을 따라 긴 초록색의 나무 잔디 대열을 보여주었던 멜버른 보타닉 가든은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는 시간을 보여주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건물 그림자 앞에 앉아 호주오픈 2013을 대형 스크린으로 보는 순간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우리처럼 그늘이 아닌 햇빛 아래에서, 작은 의자를 가져와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같은 스크린을 보는 그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었다.


야라강을 따라 걷는 우리와 조깅하는 사람들의 스쳐감만큼이나 이 도시가 주는 찰나의 즐거움이 컸다. 길을 걷다가 만나게 되는 예상치 못한 두근거림이었다. 걷다 보면 소소한 여행이 이어진다. 아니, 걷다가 멈췄을 때 이런 즐거움이 추억이 된다. 이런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예상치 못한 두근거림을 이리저리 이어지는 발자국 따라 더 많이 자유롭게 만나고 싶다. 조금 더 자주 걷다가 멈춰야겠다. 조금 더 자주 멈추었다가 다시 걸어야겠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의 순간을 더 많이 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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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호주, 멜버른,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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