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1년 육아휴직을 하고 제주에 함께 살기 시작했다. 제주로 이주하고 3년간 주말부부로 살다가 함께 지내기 시작하면서 잦은 갈등을 빚었다. 주말에만 싸우면 평일엔 고요했는데 이제는 매일매일 전투가 터지는 생활이 되었다. 두 성인이, 서로의 다름을 마주하는 데에 참 서툴렀다. 부부로 지낸지 십년이 넘었음에도, 육아와 생활고 해결이라는 두 마리 토끼만 쫓다가 상대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라는 중요한 일은 등한시했기때문이리라.
처음엔 좋았다. 일이라는 압박에서 잠시 벗어난 남편은 여유를 즐기면서 프리다이빙을 배우며 바다를 즐기고,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신기한 요리 만들기에 도전했다. 하지만, 복직을 앞두고 고민이 많아지면서 조금씩 예민해져갔다. 나는 10년동안 고생한 데에 대한 보답으로 남편의 휴직기간동안은 작은 액수지만 내가 돈을 벌고, 살림과 육아를 남편이 담당해주길 바랐다. 그렇지만, 그건 나만의 상상이었던 것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할말이 있고, 나는 나대로 할말이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난 후 나는 부랴부랴 외출을 했다. 대개는 일을 하러 가는 것이었지만, 일을 안하는 날에도 무조건 나갔다. 같이 있으면 백프로 말싸움이 시작되는 시절이었다.
어느날은 오랜만에 둘이 외출해보자고 나갔다가 카페에서 싸움이 일었다. 집에서처럼 큰소리로 말하지 못할테니 큰 싸움이 되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갈등 이슈를 꺼냈는데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한 번은 집에서 남편과 나 그리고 현지까지 셋이서 엄청난 갈등을 겪었다. 아침 잠투정이 있는 현지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니, 강직한 남편의 학교는 반드시 가야하는 거라는 말에 현지는 사춘기 아이들의 무대뽀스러움으로 대항했다. 나는 으르렁 대는 두 사람 모두에게 “그러면 안 돼”라고만 했을 뿐, 상황을 차분하게 만들지 못했다. 그 날 훌라 수업이 있었기에 둘이 알아서 하라고 한 뒤, 도망치듯 차를 몰고 달려나왔다. 눈물을 흘리면서.
춤을 출 기분이 아니었다. 강의실에 들어가 마음을 숨긴 채 반가운 척 인사를 나누고, 마지못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음 속이 가시덩굴처럼 엉망인데 아름다운 바다와 소중한 사람을 노래하는 몸짓을 어찌 몸에 욱여넣을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이 조금씩 말랑해졌다. 눈물없이 감정이 손 끝으로 스르륵 흘러나갔다. 누구도 잘못이 없었다. 그저 모두가 미숙할 뿐. 모두가 애를 쓰고 있는 것일뿐이다. 손으로 바람과 태양과 달을 만들면서 존재를 느꼈다. 바람과 태양과 달이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저 사람과 살 수가 없다. 안살아야겠다. 저 사람 없이 살 방법을 얼른 찾아보자’. 이런 생각을 머릿 속에 가득채운 채 훌라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어느새 그런 마음이 조금씩 작아져갔다. ‘나는 얼마나 잘했나? 나도 더 차분하게, 격정적으로 되지 않고 상대를 대할 수 있는 근사한 성정이 아직 없지 않나? 그만 그런게 아니니 쌍방과실인거다’. 어느새 반성모드까지 되었다.
공연준비로 트로트곡도 연습을 했다.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져서는 못 살아. 떠나가면 못 살아.” 이런 가사에 신나는 몸짓을 얹었다. 그래. 부부는 삶의 동반자이며 육아공동체, 경제공동체야. 남편이 없다면 내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될까. 아이들에게도 아빠가 필요하니까.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살아야지. 그것이 진정한 성숙이 아니겠나. 만약 갈등의 시간 이후 훌라가 아닌 일정을 가졌다면 나의 마음이 이런 방향으로 흘렀을까? 한 발 한 발 내 몸의 무게를 옮겨가며 내 마음을 촘촘히 들여다보았다.
한 두시간의 훌라로 날릴 수 없는 기나긴 갈등의 마음이 이어졌다. 10여년 간 미뤄두었던 과제를 며칠 만에 해낼 수는 없는 법. 꽉 조여맸을 운동화 끈도 시시때때로 다시 묶어줘야 하듯이 일주일에 한 번, 한 주간의 괴로운 마음을 손끝에서 흘려보냈다. 지구핵까지 꺼질 것 같은 무거운 마음으로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서, 깃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이 되어 나왔다. 아이들과 남편과 즐겁게 보냈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그러면서 내 가정을 지켜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