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 없이, 홀로 와이키키 앞바다에 산책 나왔던 아침. 분연히 훌라 욕구가 일어서 신나는 발걸음으로 바다를 향해 뛰듯이 걷기를 시작한 찰나였다. 후두둑. 후두둑. 아니 이럴수가! 내가 결심하고 5초도 안지난 것 같은데, 굵은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열 발도 떼지 않았는데 이내 걸어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비가 내렸다. 이런 일이 가능한 곳이긴 했다. 새벽 달리기 할 때에도 중간에 소나기가 내려서 비를 맞으며 달렸던 적이 있다. 숙소에 도착하기 전에 그쳤지만.
보글보글 끓던 물이 냄비 바닥에서 확 쪼그라들어 모두 증발해버리듯, 신나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눈 앞에 스타벅스가 보였다. 비가 내리니 일단 가게 안으로 들어간 나는 미국 스타벅스를 구경하며 뭘 시켜먹을까 서성거렸다. 아쉬운 마음을 글로 풀기라도 해야지. 휴대폰으로 글 쓸 수 있는 세상이니까. 아담한 디저트와 함께 오랜만에 커피를 마셔야겠다고 마음을 잡고 나니 번뜩 떠오르는 생각.
지갑을 안가져왔다. 가볍게 산책하러 나온터라 휴대폰만 가지고 나온 것. 여기는 미국이라 한국에서 쓰던 전자결제가 될 리가 없지. 스타벅스 앱도 안되겠지? 주문 줄에 서 있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따뜻한 커피가 없으니 비내리는 시간 스타벅스는 너무 춥다. 냉기가 뼈까지 스미는 듯하다. 가게를 나와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스타벅스 처마 아래 섰다. 어느 처량한 영화의 배경화면이 된 것 같다.
이 비를 맞고 숙소까지 가면 홀딱 젖을 것 같다. 나랑 같은 처지의 몇몇 사람들이 처마에 나란히 서서 비를 바라보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은 노숙자인 것 같다. 코끝에서 느껴지는 그분의 향기가 내 발을 저절로 움직여 반대편 처마로 내 몸을 옮겼다.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어야 할까? 눈 앞에 펼쳐진 바다만 바라보다가 바로 앞에 크게 자라있는 꽃나무를 봤다.
내 키를 훌쩍 넘는 위치에 하얀 꽃송이가 초록잎들 사이에 잘도 피어있다. 익숙한 꽃모양에 내가 가지고 있던 머리핀이 떠올랐다. 아, 플루메리아구나. 플루메리아가 저렇게 큰 나무로 자라는구나. 만져보고 싶어 빗방울을 조금 감내하고 두어발자국을 걸어 까치발을 하고 손을 뻗었다. 와! 이런 느낌의 꽃이라니! 꽃잎이 참 단단하면서 보드랍고 촉촉했다. 내 마당에 한 그루 심고 싶은 마음. 가지고 싶은 마음이 활활 일었다.
비가 살짝 잦아들은 틈에 후다닥 달려 숙소로 돌아왔다. 다시 아이들 틈새에 끼어 눕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신용카드와 우산을 들고 바로 다시 나왔다. 바다가 보이는 노천카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밀크티를 손에 들고 앉으니 다시 비가 내린다. 쏟아지는 비를 편하게 앉아서 바라보니 아까 처마 밑에서의 시간과 비교가 된다. 편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빗방울은 참 운치있다. 아름답기까지하다.
비를 맞으면서 훌라를 춰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비라고 다 같은 비가 아니다. 이런 장대비에 훌라를 춘다? 아무리 나같은 또라이라도 마음에 병이 있지 않은 이상은 하지 않을 일이다. 오늘이 하와이 마지막 아침이지만, 이 빗속에는 아니아니야. 그러니 오늘은 마음을 접자. 내가 결심하자마자 비를 뿌린 건 우주의 결정이야. 분명 이유가 있을거야. 아직 때가 아니라든가?
블로그에 밀렸던 하와이 여행기를 열심히 쓰고,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다가 빨리 돌아오라는 성화에 못이긴척 가족들에게 우산을 쓰고 돌아갔다. 마음 속에 커다란 씨앗을 하나 품고서. 언젠가 하와이 바다에서 훌라를 추리라. 내가 꼭 다시 돌아와서 이 씨앗을 아름다운 꽃으로 피워내리라. 제주로 돌아가서 훌라를 꾸준히 추고, 바다에서도 훌라를 추며 예행연습을 할테다. 반드시 그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