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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할 시간에 훌라를 추겠어

by 명랑소녀


성대한 축제처럼 공연을 치르고 저녁밥 회식까지 거하게 먹은 가을날을 보내고, 서로 정이 쌓인 동기생들은 연말에 송년회도 즐겁게 치렀다. 동네에서는 거의 왕언니 격이지만, 훌라에서는 한참 막내 격인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소방차의 ‘어젯밤에’를 신나게 보여드렸다. 어쩜, 술도 안 마시고 오전시간에 이렇게? 놀 수가 있느냐는 언니들의 환호에 강아지가 꼬리를 살랑거리듯 헤헤거렸다.


추운 겨울 두 달 동안 훌라 강습도 방학을 보내고 따듯한 봄날 새학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는데, 휑한 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정붙였던 동기생들이 보이질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해서 강사님께 물어보니 말씀이 별로 없으시다. 방학하기 전에 한 두 분, 각자의 사정이 있어서 훌라를 그만하게 됐다며 인사를 하시고 단톡방에서 나간 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분들과 친하신 분들이 몽창 다 나오질 않으셨다. 영문도 모르고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훌라 수업과 공연 때 외에는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하질 않았다. 코로나 시국이라 모임을 못하게 하기도 했고, 마스크 쓰고 수업 받았는데 같이 밥을 먹자 하기도 애매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래도 오래 쌓은 정이 있었기에, 많이 아쉬었다. 개인 사정이 있을 순 있지만, 단체로 이렇게 썰물처럼 사라질 수도 있는 노릇인가 이말이다.


봄학기 개강한지 몇 주 지나지 않아, 한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윤영씨한텐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고. 나와 함께 훌라를 시작해서 훌라에 푹 빠졌던 다섯 분이 당신들끼리 오붓하게 모임을 이어가기로 했다고. 배운만큼에서 스스로 연습하고 노력하면서 봉사활동을 해나갈 생각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논의해서 함께 만든 모임 이름 대신 새로이 모임 이름도 정하셨다고 했다. 올 수 있으면 오라고도 하셨다. 하지만, 그분들의 근거지는 우리집에서 한시간 반 걸리는 먼 곳이다. 제주에서는 이 거리라면 일 년에 몇 번 안 갈 곳이다.


살면서 이런 일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분들에게 어떤 이유가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분들의 사정이 있겠지. 다만, 함께 쌓아온 추억을 계속 회상할 수 없음이 아쉬웠다. 동시에 농익어가는 훌라동기이고 싶었는데 마음 한 구석이 차가운 겨울 바닷바람의 한기에 쓸리는 것 같았다. “힝.. 너무 아쉬워요. 어쩐지 선생님들이 훌라를 그만두실 것 같지는 않았는데, 안하신다는 게 이상했어요. 이렇게라도 이어가신다니 저는 아쉽지만 다행이에요. 기회되면 또 뵈어요.” 라는 말로 인사를 마쳤다.


얼마 후에 연락이 왔다. 그분들 공연하는데, 나와 함께 공연했을 때 입었던 공연복을 쓰려고 한다. 그런데, 공연복이 부족하니 내가 그 공연복을 입지 않으면 파는게 어떻겠느냐고. 공연복이라는 게 함께 입고 공연할 이들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니. 그 공연 이후로 장농에 박혀있던 옷들을 꺼내서 기쁜 마음으로 건네드렸다. 오랜만에 얼굴을 뵈니 서운함이 먹구름처럼 나를 덮쳤지만, 아무 내색없이 근황을 열심히 물었다. 당신들만의 모임을 어떻게 꾸려가는지. 때때로 전문 강사를 섭외하거나 찾아가서 특강을 듣기도 하고, 스스로 안무를 만들어서 공연을 하러 다닌다고. 멋있었다. 함께 할 수 없기에, 아쉬운 마음이 컸다.


새학기에 오신 분들과 얼굴을 익힐 즈음에 강사님은 공연일정을 가져오셨다. 신입생들은 깜짝 놀라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냐며 재차 확인하는 것을 보니 하실 분들 같았다. 나는 3년만에 익힌 ‘푸아 키엘레’를 집중적으로 연습하면서 최단시간에 이 어려운 곡을 공연해내는 신입 훌라댄서들을 지켜보았다. 제각각의 이유로 훌라교실을 찾아온 이 분들은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같이 점심먹자는 제안을 하고, 훌라를 찾아온 이유도 물으며 친분을 쌓았다. 승마에 아쿠아스포츠에 다재다능한 언니도, 코어 강화에 훌라가 좋다고 해서 왔다는 언니도, 코로나 전에 배우기 시작했다가 코로나동안 쉬었다가 돌아온 언니도 있었다.


오래전에 영어공부카페에서 운영진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받아서 정을 주었다가 떠나보내는 경험을 했다. 호주에 머물 때에도 난 진득하게 한 곳에서 일하며 지냈는데, 많은 친구들이 찾아와서 마구 친해졌다가 가슴아리게 이별하는 과정을 반복했었다. 지금도 제주에 살며, 1년 살이, 2년 살이로 제주에서 시간을 지내다 가는 이들과 매년 이별하며 살고 있다.


이번 학기에 만난 언니들과는 사적으로 공연을 했다. 승마장에 다닌다는 언니가 승마동호회 회식에 훌라공연을 하고 싶다는 말에 세명이서 단촐하게 공연을 했다. 어느 대학교 주차장 소나무 아래에서 더운날 예행연습을 했다. 승마장에 찾아가, 맨발로 다녀도 되는 바닥인지 확신하기 어려운 돌바닥에서 훌라를 선보였다. 재미난 추억을 새로운 챕터에 만들어가고 있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파도처럼 새로운 인연은 나타나고 오랜 인연은 저물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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