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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아침 Oct 13. 2024

엄마 5 - 이거 저거 그거

이거 저거 그거


* 2019년 4월 20일 일기.


이름을 잃어버린 남자에 관해서 여러 번 쓰다가 지웠다.


필체가 단정하고 반듯해서 누구나 감탄하던 남자였다. 한자를 쓸 때에도, 한글을 쓸 때에도, 어느 때든 가리지 않고 자기의 질서와 자기의 윤리를 적용한 필체를 구사하는 남자였다.


그 남자는 생의 끝자락에 이르러서 은행 서류에 자신의 이름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한 번 쓰러지고 난 뒤 몸의 절반을 쓰기가 힘들어졌을 때였다. 남자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어.”


그 말이 남자의 아내를 오랫동안 슬프게 만들었다.


2001년의 일이었는데, 일주일 전에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자기 이름 쓰는 법을 알지 못하게 된 그 남자는 나의 아버지였다. 나는 그 남자의 아내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 2020년 4월 어느 날.


엄마는 은행에서 신용카드 갱신을 거부당했다. 체크카드만 발급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엄마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였다.


은행에서 몇 가지 업무를 보면서, 엄마는 자필로 서류를 작성해야 했다.


힘주어 잡은 펜으로 천천히, 삐뚤빼뚤 글씨를 써내려가던 엄마가 갑자기 멈추었다.


“김 서방! 7을 어떻게 쓰더라?”


엄마가 민망한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은행업무를 다 보고 집에 돌아오자 남편이 엄마를 놀리기 시작했다.


“우리 엄니, 글자 공부 다시 해야겠어요!”

“김 서방도 늙어 봐.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니까!”

“에이, 그러니까 공부를 계속 해야죠. 매일 같이 글자 공부하게요.”


뇌졸중이나 중풍이 엄마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엄마가 갖고 있는 질병이란, 고혈압과 당뇨와 갑상선과 백내장과 녹내장과 관절염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종종 단어를 잊었다. 정확히 말하면 하루씩 무언가를 잊어가는 중인 것 같다. 나이가 든 노인들은 명사를 먼저 잊는다. 이거, 저거, 그거……. 노인들의 언어는 그렇게 관형사로 대체된다.


며칠 전에는 엄마가 사과를 잊었다.


“그거 뭐지? 배 닮은 거?”

“사과?”

“맞다! 사과! 이제는 사과도 모르네.”


엄마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온종일 보지 않는 뉴스가 없고, 보지 않는 드라마가 없다. 날씨 뉴스부터 나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그렇지만 당신 사위는 매우 꼼꼼히 챙기는 스포츠 뉴스까지 섭렵한다. 그리고 아침상에서 화제로 꺼낸다. 김 서방, 어제 축구 봤어? 어제 야구 봤어? 오늘부터 삼일 동안 비 온대. 미국에 갑자기 엄청난 태풍 같은 거 온 거 봤어? 사람이 엄청 죽었어. 이런 얘기들…….


점차로 그런 얘기들에 구멍이 숭숭 나기 시작한다.


“저기 거기 어디지? 거기 바람이 너무 무섭게 불어서 테레비에 나오는데 아주 무섭더라.”


“이번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그거 뭐지 그거 노란 거, 우리 겨울에 먹는 거, 그거 농사가 잘 안 됐대.”


구멍이 숭숭 난 이야기 속으로 시린 바람이 분다. 그 바람에 뼈가 저리고 살이 아려 온다.


늙지 않고 살 수 있는 마법은 없나요?

잊지 않고 늙는 기적은 없나요?

노인의 생이 슬프지 않을 방법은 없나요?  


#엄마 #노인 #백세시대 #가족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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