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한 숟가락 더 먹었는데, 그러면 안 될까요?
2019년까지는 엄마와 함께 서울의 종합병원으로 정기검진을 하러 다녔다. 오랫동안 엄마가 다녔던 병원이었다. 익숙한 의료서비스가 주는 안정감 역시 엄마에게는 위안의 처방전이었다. 또한 병원을 핑계로 서울 나들이하는 설렘을 계속 유지해주고 싶었다.
2003년 아빠가 돌아가셨고, 엄마는 당뇨병 환자가 되었다. 성당에 다녀오던 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는데, 그게 저혈당 쇼크였다. 갑상선과 고혈압에 당뇨병이 추가되었고, 병원에서 기다란 주의사항과 추천 식단을 받아왔다.
근심어린 표정의 엄마는 당장 의사가 시키는 대로 스스로 혈당을 체크할 수 있는 혈당체크기를 샀다. 매일 혈당을 체크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새로 사들여야 할 식재료, 바꾸어야만 하는 식습관, 당뇨에 좋은 음식을 냉장고에 붙여 놓았다. 아파트 옆 천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에서 운동하는 시간을 정했고, 실내에서도 운동을 할 수 있게 러닝머신을 들여놓았다. 텔레비전에는 당뇨병 진단을 받은 연예인이 자기 관리를 하는 일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늘 틀어져 있었다.
군인이었던 아빠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군인의 아내는 남아서 자기 생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현미밥을 먹기 시작했고, 본래도 좋아하던 야채 섭취를 더 늘렸고, 기름이 적은 부위의 소고기를 끼니 당 세 점씩 구워 먹었다. 아빠는 살아서 사과 1/3쪽씩을 나눠먹었고, 엄마는 이제 사과 한 알을 하루에 걸쳐서 먹게 되었다. 한 번에 1/3쪽씩 먹는 건 똑같았다. 아침 식사를 하고 한 시간 뒤에는 산책로를 따라 걸었고, 저녁에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러닝머신에서 걸었다. 우리 집에서는 러닝머신이 빨래걸이로 쓰인 적이 없었다. 당뇨 수치를 낮추고 당뇨 합병증을 예방하기 위한 총력을 기울였다.
정기검진을 갈 때마다 의사는 엄마를 칭찬했다. 우선 엄마의 패션부터 칭찬했다. 엄마는 예쁜 할머니답게, 병원에 갈 때도 짙은 와인 컬러나 딥그린 벨벳 모자 같은 걸 쓰고 갔다.
“어쩜 이렇게 예쁜 모자를 쓰고 오셨어요?”
의사가 말하면, 엄마는 소녀처럼 웃었다.
“어쩜 이렇게 당뇨 관리도 잘하시고!”
의사가 말하면, 엄마는 자기의 하루 일과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네, 네, 잘하고 계세요. 완전 모범사례입니다!”
제주에 이사와 살면서도 병원은 그대로 다녔다. 일 년에 서너 차례 병원 핑계로 서울 나들이 하는 게 엄마에게는 낙이었다. 문제는 코로나였다. 어쩔 수 없이 엄마는 서울행을 포기했고, 병원도 제주 병원으로 바꿨다. 그러면서 늘 먹던 약이 달라졌다. 제주에는 해당 약을 쓰는 약국이 없고, 같은 성분의 다른 약을 써야 했다.
이때부터 엄마의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식단을 신경 쓴다고 쓰는데도, 늘 유지하던 혈당 수치가 들쑥날쑥하게 되었다. 엄마는 바뀐 약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엄마의 생활이 이미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극단적으로 코로나를 조심하느라 엄마는 공원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처음 러닝머신을 타기 시작했을 때에 비해서 어마는 십 수 년 더 늙어 있었다. 우리 집 러닝머신에도 빨래가 걸려 있는 날이 늘어갔다.
변함없이 매일 하는 것은, 자가 혈당 체크였다. 하루 한 번 하던 것이 삼시세번 체크로 바뀌었다. 이제 주객이 전도됐다. 혈당체크가 엄마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박과 조바심이 가득한 나날들.
예전과 달리 혈당 관리가 잘 되지 않는 걸 의사도 이상하게 여겼다. 엄마는 애처롭게 말했다.
“요즘에 배가 고파서 한 숟가락씩 밥을 더 먹었는데, 그래서 그럴까요?”
의사는 이 말을 귀담아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처방전을 조정하면서 한 마디 했다.
“혈당 체크 매일 하는 거 하지 마세요. 너무 스트레스 받으면 좋지 않아요.”
병원을 나오면서 다시 한 번 엄마에게 다짐을 받았다. 이제 매일 손가락에 바늘 찔러서 하는 그 혈당 검사를 당장 그만 하라고 말이다. 의사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했던 엄마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걸 해야 밥을 얼마나 먹을지 조절을 하지. 안 그러면 먹고 싶은 대로 막 먹다가 큰일이 나게.”
“엄마는 지금도 너무 말랐어. 조금 더 먹어도 괜찮아요.”
엄마는 동의하지 않았다. 당뇨가 일으킬 수 있는 모든 합병증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내게 짐이 되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내가 너한테 짐이 되면 쓰겠어?!”
“짐은 무슨 짐이야? 그런 말을 왜 해?”
“너도 한 번은 아무것도 안 챙기고 가볍게 살아봐야 하지 않겠어? 내가 합병증까지 생겨봐라!”
“그냥 마음 좀 편히 먹으라고. 합병증 생기면 생기는 대로 또 대처를 하면 되지!”
“너도 한 번은 아무것도 안 챙기고 가볍게 살아봐야 하는데……. 맨날 노인네들이랑만…….”
너한테 짐이 될 수는 없어! 나는 이 얘기를 평생 들어왔다. 친구들 부모님 보다 나이가 더 많은 우리 엄마와 아빠는 사는 동안 내내 죽는 걸 걱정해 왔다. 죽을 때 돼서 내게 짐이 되면 안 된다고, 건강하게 죽어야 한다고, 그러니 규칙적으로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해야 한다고, 둘이 늘 그런 얘기를 하며 살았다. 덕분에 8남매의 장남인 아빠는 병사한 자신의 남자형제들 중에서 가장 늦게까지 건강한 상태로 살았다. 그리고 지금 엄마는 내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삼시세번 혈당 체크를 하고, 밥 한 숟가락을 더 먹은 게 잘못일까 봐 전전긍긍하는 그런 시간을 지낸다.
할머니의 생애를 탕진하고 살았듯, 아빠의 시간도, 엄마의 시간도 탈탈 털어먹으며 살아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지 않을 방법이 별로 없었다. 한 번쯤은 가벼운 인생을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엄마는 말했지만, 가벼운 인생이란 대체 뭘까. 그들의 미리 앞질러 간 시간과 마음 없이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나의 노인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은 남편과 내가 노인이 될 것이다. 인생은 어떻게든 가볍지 않고, 우리는 서로에게 짐으로 늙는다. 나는 가능한 오래 엄마라는 등짐을 지고 살기를 바란다. 나의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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