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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판중 Oct 18. 2022

특허 협상 이야기 – 에피소드 17 (협상 준비(1))

B사가 제기한 소송과 우리 회사가 제기한 반소는 법원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절차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소송은 디스커버리 제도로 인해 검토해야 할 자료가 방대하고,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소모전이다. 

CP&L은 소송 비용이 1년간 약 500만불 정도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알려주었고 이것도 CP&L이 비용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로펌에 비해 상당히 싸게 청구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윤변호사도 이에 동의했다. 


로펌의 입장에서는 소송이 계속 진행되는 것이 좋은 일이겠지만 회사의 입장에서는 무척 부담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자칫 소송이 우리 회사에 불리하게 진행된다고 한다면 회사의 리스크가 더 커지는 것이어서 잘못하면 소송 비용은 비용대로 지불하고 패소의 데미지까지 감당해야 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생각하기 싫지만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 팀은 물론이고 회사 경영이 어려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B사와의 협상을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서 협상의 전반적인 전략에 대해 윤변호사에게 전화로 자문을 구했다. 

"윤변호사님도 아시다시피 우리 회사는 지난 여름 B사로부터 경고장을 받고도 무시하고 있다가, 바로 소송을 당하게 되어 이번 소송과 관련하여 B사의 요구 조건이나 의도를 파악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내부적인 분석으로는 우리 회사가 B사의 오랜 고객이던 미국set업체로부터 장기 공급계약을 따내고, 우리회사의 World-wide 점유율이 급격히 신장함에 따라 B사가 위기감을 갖고 우리 회사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 좋을까요?"

내가 두서없이 질문을 시작했다.

"새빛 전자 입장에서는 소송이 유리하게 진행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계획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빛전자도 반소장을 제출하기는 하였습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특허의 개수나 품질로 봤을 때 아무래도 B사에 비해 불리한 싸움을 벌이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또한, 디스커버리 과정에서 불리한 증거가 발견될 리스크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회사들은 소송의 실질적인 이슈보다 디스커버리 대응에 실패해서 소송을 지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새빛전자로서는 소송 리스크가 현실화되기 전에 가능한 협상을 통해 조기 타결에 이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새빛전자가 보낸 협상 제안에 대한 B사의 반응을 살펴서 그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만요."

윤변호사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무래도 소송을 직접 대리하는 입장은 아니니 만큼 조금 더 객관적인 분석이 가능한 것 같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내에서도 이렇게 된 것 소송 끝까지 가보자는 일부 강경한 목소리도 있습니다만,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하면 소송을 계속 진행하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나도 동의했다. 이번 소송을 대응하면서 조금씩 아는게 많아질수록 걱정만 더 많아지는 것이 소송이 끝까지 가게 되면 내가 먼저 쓰러질 것 같다. 


"B사가 협상 제안에 응하게 된다면 우선 양사 특허의 침해성과 무효성에 대하여 서로의 포지션을 파악하기 위한 기술협상(Patent Discussion)이 진행될 것입니다. 

기술협상을 통해 양사간에 유불리가 어느정도 판단될 수 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B사에 밀리지 않는 공격/방어 논리를 잘 만들어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 단계로는, 타결 조건에 대해 논의하는 비즈니스 협상(Business Negotiation)이 진행될 것입니다. 

비즈니스 협상에서는 실질적인 로열티 금액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새빛전자도 관련 제품에 대한 회사의 매출액, 지역별 물량, 원가, 이익률 등을 조사해서 이를 기초로 합리적인 타결 조건을 미리 도출하고 이에 대해 경영진의 컨펌을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윤변호사의 말을 들으니 협상의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역시 전문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요새 마음이 불안하고 잠도 잘 안오는데 이 기회에 정신과에서도 전문가의 상담을 받아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협상에 임하면서 상대방의 기세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BATN를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드시 협상을 타결해야 하는 입장에 있으면 아무래도 더 많이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BATNA요?"

윤변호사가 갑자기 생소한 단어를 꺼내서 질문했다. 


"BATNA는 Best Alternative To Negotiated Agreement라는 의미로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를 대비한 대안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새빛전자의 제품이 미국에서 판매 물량이 별로 없어서 소송을 끝까지 가볼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의 BATNA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회피설계(Design Around) 안을 확보해서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B사 특허의 라이선스가 필요없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면 이 역시 강력한 BATNA가 될것 입니다."

윤변호사와 대화하면서 또 하나 배웠다. 

내가 수정이한테 꼼짝 못하는 것도 BATNA가 없어서 그런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윤변호사와 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윤변호사한테 많이 배웠다고 거듭 감사하다고 하면서 통화를 마쳤다. 

질문을 하면 척척 답을 제공해주니 다음에는 인생 상담도 좀 해봐야겠다. 


윤변호사와 통화를 마치고 우선 기술 협상에 집중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느정도 현재 상황에 대해 업데이트를 마친 정과장에게 당면한 주요 일정이 기술 협상이라고 설명했다.

정과장도 수긍하고 제품 개발팀과 미팅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수석님, 저희 팀 정과장이 소송대응 업무에 참여하게 되어 미팅에 함께 

참석했습니다."

회의를 시작하면서 정과장의 합류 소식을 전했다. 

"네, 연구지원팀 인재들이 모두 참여하시는 군요. 

앞으로 잘해 보십니다." 

이수석이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과장이 화답했다. 


"B사에 협상 제안 메일을 보냈고 현재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B사의 반응을 살펴봐야 겠지만, 기술미팅이 바로 진행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지금 모두들 잘 해주고 게시지만 선행기술 조사, 분석 일정을 좀 더 서두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늘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라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은 일이기 때문에 본론을 바로 말했다. 

"B사에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요. 

우리도 지금 가능한 인원은 모두 투입되서 작업하고 있으니까 가능한 빨리 분석 결과 공유 드리겠습니다."

이수석이 말했다. 


"그리고, 혹시 문제되는 특허의 회피설계안도 준비가 가능할까요?"

나는 윤변호사에게 들은 BATNA에 대한 개념과 회피설계안이 왜 필요한지 설명했다. 


이수석을 포함한 제품개발팀 연구원들의 표정이 순간 조금 일그러졌지만 아무도 선뜻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저번에 논의한 것 같은데 우리 제품 Spec.을 변경하려면 Set 업체에 승인을 받아야 해서 그게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솔직히 지금 회피설계를 검토할 수 있는 여력도 없구요."

이수석이 평소와 달리 난색을 표하며 말을 꺼냈다. 


"어려운 점이 많은 것은 알지만 일이 잘못되면 제품 판매 자체가 중단될 수도 있는 사안입니다.

어떻게든 회피설계안을 만들어 보시죠.

Set 업체 승인 문제는 저희 팀에서 책임 지겠습니다."

잠자코 회의를 지겨보던 정과장이 끼어들어서 단호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내부적으로 다시 한번 논의해보겠습니다."

이수석이 여전히 마뜩잖은 표정으로 답변했다. 


정과장이 밀어붙여서 어찌됐든 회피설계안도 검토하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나는 속으로 지원 병력이 있으니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구나 생각했다. 

나머지 회의에서 B사 특허에 대한 선행기술 분석 워크샵 일정이 정해졌고, 이날 북극해의 변호사, 변리사들도 참석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장대리, 다른 팀과 회의할 때 너무 무른 태도는 곤란해.

이번 일이 잘못되면 우리 팀이 모두 뒤집어 쓰는 거라고." 

회의를 마치고 나서 정과장이 나에게 훈계하듯이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오래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Tip 17. 

협상이 결렬되었을 경우를 상정하여, 유리한 BATNA(Best Alternative To Negotiated Agreement)를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BATNA는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말하며, 협상 당사자는 현재의 협상 사안에만 매달리지 말고 항상 상대방보다 유리한 BATNA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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