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불안정

커뮤니티, 일, 공백

by 이웃주민

연재 11


우리 나이로 서른이 되면서 나는 일터를 옮겼다. 새로운 대안으로 지방정부(구청)와 지역NGO 등의 협력으로 통해 조성되고 있던 '마을만들기' 지원기관으로 터를 잡았다. 일방으로 전달하고 돕는 시혜적인 측면이 여전히 강했던 기존의 복지 영역에서, 로컬 공간을 기반으로 도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지원하는 일이 도전적이고 매력 있게 다가왔다. 그 무렵부터 동시다발적으로 시도된 소위 '사회혁신' 정책과 사업들, 즉 도시재생, 사회적경제, 로컬혁신 등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일터에서 후반으로 치달은 30대까지 일했다. 직접적인 플레이어였던 적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 지원하는 기관에서 일했다. 간사, 활동가, 코디네이터, 연구원 등으로 불렸다.


주민과 커뮤니티


부연하면 사회복지, 지역사회 NGO, 공공정책 등 내가 엮여서 사회생활을 한 영역은 지난 10년 사이 굉장히 많은 변화와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원래 존재하던 전통적인 민간/공공기관 외에 여러 하이브리드 타입의 '혼종 사업단'이 생겨났다. 지역사회와 커뮤니티 활성화를 지원하는 마을만들기/도시재생 사업, 공공부문과 민간영역의 파트너십을 통해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협치, 주민참여 사업,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지속가능성을 함께 달성하는 사회적경제(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등) 육성 사업 등. 국지적인 실천이나 정책 아이디어로 존재하던 일들이 (지방)정부의 사업으로 채택되어, 현장에서는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물밀듯이 많은 일이 전개되었다(이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한다).


2012년, 서울에서는 처음 설립된 '마을만들기 지원센터'라는 신생 조직에서 일을 시작했다. 공교롭게 이름도 '주민'이다. 온라인 커뮤니티가 더 익숙한 시대에 오프라인 커뮤니티, 특히 지역과 장소 기반 커뮤니티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와 영향(impact)을 줄 수 있을까.


과거처럼 평생 정주하고 강하게 결속하는 모습의 마을공동체와는 차이가 있지만,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한계를 가진 인간의 특성상 여전히 지역과 공간은 사람 관계와 삶의 양식을 형성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다.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형태의 '커뮤니티 경험'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도 분명 감지된다. 현대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하여, 생활권에서 필요한 관계망을 만드는 활동을 지원하는 일을 기획하고 시행했다.


매일, 시간, 초단위로 대형 포털사이트에서는 별로 생산적이지 않은 중앙정치 이슈나 가십성 보도로 가득하다. 나는 미시 세계를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돌보고 곁을 살피며 일상을 창의적으로 수놓는 사람들이 건강한 사회를 떠받칠 것이다.


사실 나만해도 공동체와 익숙하지는 않다. 그것이 점차 해체되고 개인주의의 확산, 나 홀로 삶의 폭증, 개별적 취향을 중시하는 흐름의 문화에서 살아왔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보면 ‘내 거 네 거 없이’ 하숙집에서 부대껴 살았던 그 시절 X세대 청춘들(70년대생)의 삶이 나온다. 새천년 넘어 2002년, 그들은 사회인이 되고 사연 많았던 하숙집은 문을 닫는다.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 그 후로는 혼자 사는 자취, 원룸 생활이 주를 이루게 되고 그 무렵부터 밀레니얼들의 20대가 시작된다.


그럼에도 커뮤니티에 관심을 가진 건, 그 어떤 갈구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개인, 1인분, 홀로만 놓여있을 때 주기적으로 밀려오곤 하는 허하고 휑한 고독감, 인스턴트 식 가벼운 관계나 쿨한 헤어짐이 자아내는 가슴 시린 상처들, 그리하여 어느 정도는 질기고 서로를 보듬으며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관계에 대한 갈망이 내면에 짙게 자리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관계 맺는 게 어려울 때가 많은 수줍은 사람이다. 삶 속에서 커뮤니티를 갖는다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서울은 어릴 적 자라온 동네를 전면적으로 철거하며 파괴해온 공간이다. 광활한 도시 속에서 유랑민이자 이방인처럼 살 때가 많다. 그럼에도 관계와 연결을 갈망한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은 이어져 있고 서로 공유하는 기억과 터전이 있어야 사회적 존재인 자아를 피력할 수 있다. 형태와 패턴은 바뀔 수 있을지언정 커뮤니티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규정하는 개념이자 실체일 것이다.


자발 비자발이 뒤섞인 공백들


기존에는 잘 보이지 않던, 새로운 방식으로 과업을 추진하는 일터와 프로젝트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한 가지 영역의 일도 아니다. 전통적인 복지, 문화, 경제, 시민사회, 정부 영역을 넘나들고 교차하며 발생했다. 기존 형태의 NGO에서 새로 등장하는 '혼종 조직'으로 옮기면서부터 30대를 시작했다.


이 분야 일들은, 새롭고 도전적인 면도 있었고 사회를 혁신하고자 하는 열정을 품은 사람도 많았지만, 탄탄하게 자리 잡거나 제도화되지 않았다. 이제 막 형성되는 사업의 특성상 안정적이진 않았다. 1년이 채 안 되는 시범사업 형태이거나 연 단위의 단기 프로젝트, 조금 길면 3년 정도의 위탁사업(정부에서 관련 민간법인에게 일을 맡겨서 시행함)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디에든 잘하는 분들은 있다. 전문성을 키워 여기저기서 모셔가는 분도 있었다. 변화의 흐름을 포착하고 틈새를 공략하여 새로운 창업을 해서 번창한 분도 있었다. 공공 혹은 민간영역에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면서 사회에 기여하는 훌륭한 분도 있었다. 반대로 많은 분들은 시행 초기의 잡음, 우여곡절, 쓰라린 갈등, (공공-민간 등)상호 간의 이해 부족, 이상과 다른 현실 속에서 마음 상하고 몸 상하며 바스러져갔다. 어떤 청년들은 기대를 품고 왔다가 열악하고 불안정한 현실을 보며, 잘 갖춰지지 않은 어지러운 일터와 고생하는 선배들을 보며, 공익과 혁신을 부르짖는 영역에서도 버젓이 버티고 있는 꼰대 스타일의 선임을 보며 하나 둘 떠나기도 했다.


여하튼 의미나 가치를 떠나 일자리 형태로만 봤을 때는 이직이나 공백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벗어나지 않았다. 고용 안정의 틀로 비추어 보면, 위태롭고 다음을 생각해야 하고 미래가 불투명했다.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기간을 두거나 시범으로 시작했어도 정형화된 곳보다는 매력적일 거 같아서 뛰어들었다. 그리고 누가 나가라고 등 떠민 것이 아닌 자발적 퇴사의 순간. 더 계약할 수 있음에도 완곡히 고사하고 딱 그해 만료까지만 한 적도 있다. 그런 후 '자체 안식월'이라며 제 돈 들여 두어 달 해외에 다녀왔다. 다른 사회가 궁금했고 보고 싶었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았다. 떠남의 지출이 남아있어서 생길 수입보다 값지게 느껴졌다. 일탈의 해방감과 낯선 땅에서의 설렘이 지나간 후에는 다시 한없이 불안했다. 공백기를 거쳐 관련 일을 찾아서 했다. 이런 거 보면 나는 확실히 밀레니얼이었다. '욜로 라이프'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다음 편에 계속]

대문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