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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티브 Dec 16. 2018

자연분만 실패한 저는 '루저'일까요

[엄마발달백과] 출산은 엄마와 아이가 만나는 과정일 뿐 

육아책의 주어는 늘 아이입니다. 아이를 위해 엄마가 해야 할 것을 끝없이 나열합니다. 그럼 엄마는 누가 돌봐주죠? 처음부터 엄마인 사람은 없습니다. 육아는 아이도 엄마도 함께 자라게 합니다. '엄마발달백과'는 임신·출산·육아를 전지적 엄마 시점으로 다시 씁니다. 매주 월요일 만나요.


[엄마발달백과 - 출산편 ①]


안녕하세요. '마더티브' 에디터 주영입니다.

분만 침대에 누워 힘껏 아이를 낳을 거라는 전제를 의심해본 적이 없었습니다자연분만은 말 그대로 가장 자연스럽게 출산하는 방식이니까요진통을 견디고 힘을 줘서 아이를 세상 밖으로 밀어내면 되는 줄 알았죠다른 방식의 분만은 선택지에 없었어요자연분만이 수술보다 부작용이 덜하고 출산 후 회복도 빠른 데다무엇보다 아이에게 좋다고 하니 당연히 자연분만을 해야 한다고 믿었죠.

임신 28주 정기검진 때로 기억합니다주치의에게 날벼락 같은 결과를 들었어요.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겠네요.


의사는 배 속 아기가 돌지 않아서즉 역아여서 이대로는 자연분만이 어렵다고 진단했습니다임신 후기에 접어들면 아기가 엄마의 다리 쪽으로 머리를 두는 게 정상 방향이에요그래야만 분만할 때 머리부터 팔다리 순차적으로 나올 수 있거든요반면 저희 아이는 머리가 계속 위쪽을 향해 있었어요역아 자연분만은 위험해서 대부분 제왕절개 수술로 낳는 편이에요배를 절개해 아이를 꺼내야 한다는 뜻이죠.

이럴 수가엄마에게 물려받은 타고난 왕골반을 써보지도 못한다니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야말로 머리는 백지장이었습니다. 데드라인은 임신 32. 그때까지 아이가 방향을 틀지 않으면 수술 날짜 잡기로 했습니다

그날부로 정말 할 수 있는 건 다 했던 것 같네요. 고양이 요가 자세가 역아 돌리는 데 도움이 된다 해서 집에선 거의 네 발 동물처럼 엎드려 살았고때와 장소 구분 없이 배를 문지르며 아이에게 제발 돌아달라고 읍소도 해봤죠


그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아요


(출처: unsplash)


그렇게 약속의 32주를 맞이했습니다의사는 초음파로 배 속을 살펴보더니 조심스럽게 결과를 알려줬어요. “다음 검진까지 원하는 수술 날짜를 정해오세요.” 결과는 실패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아이는 꼼짝도 안 했더군요이대로 포기하기는 싫었어요왠지 방법이 있을 것 같아 이리저리 알아봤는데다행히도 자연분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역아회전술. 산모 배를 손으로 밀어서 배 속 아기를 돌리는 시술이에요맘카페 후기나 질문이 여러 건 올라와 있는 걸 보면 역아를 품은 산모들이 많이 알아보는 듯합니다찾아보니 몇몇 대학병원이 유명하고 성공사례도 꽤 있더군요다만 아기를 돌릴 때 아프고성공을 장담 못 할뿐더러, 시술하다 잘 안되면 응급수술을 할 수도 있대요
  
그럼에도 전 위험을 감수하고 역아회전술을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자연분만을 해낼 수만 있다면 가능한 건 다 해볼 생각이었어요역아 돌리기에 성공해서 자연분만했다는 엄마들의 후기를 읽으며 더욱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다음 검진 때 주치의를 찾아가 수술 희망 날짜 대신 역아회전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잘하는 병원을 추천해달라고 물어볼 요량이었죠의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습니다.


꽤 아프고 힘들 텐데... 그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아요. 뭣 하러 두 번이나 고생하려 해요?(웃음)


저는 불안했던 것 같아요배를 가르는 게 가벼운 수술이 아니니 무섭기도 했지만무엇보다 아이가 자연분만의 장점을 누리지 못한 채 세상에 나와도 괜찮을까 하는 죄책감 때문이었어요자연분만한 아기는 제왕절개 아기보다 면역력이 강해서 아토피피부염에 걸리는 확률이 낮고뇌 기능이 활발할 뿐만 아니라태어나자마자 스스로 자연스럽게 호흡할 수 있대요그렇다면 제왕절개로 태어날 내 아이는 자연분만 아기보다 덜 건강하고 덜 똑똑하며 호흡이 불안정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 싶었죠.
  
의사 말을 들으며 제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걸 어렴풋 알게 됐습니다아이와 내가 무사히 만나는 게 출산의 목적인데자연분만에 성공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욕심아이를 완전무결하게 키우고 싶다는 조바심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경쟁심 같은 마음이 앞섰던 것 같아요결국 전 제왕절개를 하기로 마음먹고임신 38주가 되는 12월 8일로 수술 날짜를 정했습니다.
  
드디어 아이와 만나는 날수술대에 십자가 모양으로 누워 팔다리가 묶이고 있는데 불현듯 임신출산육아백과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지 뭐예요


고생 끝에 자연분만에 성공하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부심과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 제왕절개는 자연분만에 비해 부작용과 합병증이 많다. (...) 산모가 정서적으로 허탈감을 느낄 수 있다. 제왕절개 분만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산모의 감정 상태다. 출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는 실패감과 열 달 동안 자연분만을 계획하고 노력한 결과에 대한 허망함을 느껴 육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확신에 찬 그 말 앞에서 전 또다시 슬퍼졌습니다이대로 자연분만을 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휩싸여 아이와 조우하게 되는 건가제왕절개로 아이를 낳는 난 루저인 건가. 뛰는 심장과 복잡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시끄러워진 사이의료진이 다가와 입에 산소호흡기를 씌우며 말했습니다. “푹 주무세요.”


출산은 도전과제가 아니다


(출처: unsplash)


산모님 일어나세요아기 보여드릴게요." 마취가 덜 풀려 자꾸 감기는 눈을 힘주어 떴습니다고개를 겨우 가눠 주변을 살피니 가지런히 늘어선 환자용 베드가 보였어요수술을 끝난 뒤 회복실로 옮겨진 걸 그제야 알았죠저 멀리서 간호사가 두툼한 이불 포대기 같은 걸 안고 다가왔습니다그 이불 속에서는 얼굴이 벌건 아기가 까만 눈을 반짝이고 있었어요
  
무사했구나고마워다행이다이걸로 충분해.’ 딱 네 문장 외에는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출산에 적극 참여하지 못했다는 패배감 허망함 같은 건 머릿속에서 진작 사라졌죠물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부심과 성취감 또한 느끼지 못했지만 상관없었습니다더는 제게 출산은 성취와 승패의 영역이 아니었으니까요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듯 벅차고 코가 시큰하긴 했는데그건 열 달 만에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는 설렘이자 살아 있다는 안도감이었던 것 같아요
  
간호사가 제 상의 단추를 풀더니 아이에게 젖을 물려줬습니다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엄마 가슴을 힘차게 빠는 아이의 입이 어찌나 야무지던지그때 저는 속으로 조용히 빌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 아이의 다부진 입, 말랑한 살, 빛나는 눈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래도록 이 촉감을 느끼며 살게 해주세요. 이름을 부르면 아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자연분만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제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게 아닙니다선택이란 걸 할 수 있다면 웬만해선 자연분만을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자연분만이 제왕절개보다 산모의 회복력이 빠른 건 사실이니까요다만 자연분만이 좋다는 말과 자연분만을 해야 엄마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연분만이든 제왕절개든 출산은 엄마와 아이가 세상에서 건강하게 만나는 과정이지 도전 과제는 아니니까요
  
이 세상에 쉬운 출산은 없습니다제왕절개를 하면 며칠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해요누군가는 애 낳을 때 진통을 느껴야 모성애가 생긴다고 하는데그런 원리라면 제왕절개를 한 산모는 모성애가 넘쳐흘러서 헤엄쳐 다녀야 할 겁니다수술 후 온몸이 바스러질 듯한 고통을 겪는데도 그걸 참고 겨우 걸어가 어떻게든 아이의 얼굴을 보고 젖을 물리니까요
  
무엇보다도 많은 산모들이 출산에 너무 많은 힘과 감정을 소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어떻게 분만하든 엄마와 아이가 무사히 만나면 되는 거니까요출산은 짧고 육아는 길답니다인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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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발달백과 - 출산편 ②]


[엄마발달백과 - 출산편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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