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골목 식당의 오래된 방에서, 캐나다 주방까지 이어진 시간
자장면은 늘 중화요릿집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고정관념 속에 살아왔다. 집에서 만들어 먹기보다는 누군가가 정성껏 만들어 내오는 그릇을 받아 들고, 익숙한 맛을 기대하는 음식이었다. 식당 음식은 집밥에 비해 맛이 있다 없다를 두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었다. 믿음 없이도 먹으면 맛이었다.
국민 간식이라 불리던 자장면은 이제 ‘서민 간식’의 틀을 넘어, 당당한 한 끼 식사로 자리 잡았다.
이곳 캐나다에서도 집 근처에 몇 군데 중화요릿집이 있다. 다만 가격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다. 택스에 팁까지 포함하면, 예전에 한국에서 저렴하게 먹던 자장면은 더 이상 캐나다에서도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아니다.
그런 이유로 몇 차례 자장면과 짬뽕을 직접 만들어 먹었다. 사실 두 음식의 조리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가장 큰 차이는 '면'에서 갈린다. 시중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면발로는 중화요릿집 특유의 탱글탱글한 식감을 완벽히 재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만든 자장면은 꽤나 훌륭한 흉내를 냈다. 나름대로 만족할만한 수준이었다.
오늘도 자장면을 만들기로 했다. 레시피를 공개하거나 비법을 논할 정도는 아니다. 유튜브에 더 친절하고 체계적인 정보들이 널려 있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 요리에 정석은 없었다. 음식 이름에 걸맞은 기본 맛을 지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했다.
볶은 춘장에 냉장고 속 식재료를 더하고, 감칠맛을 위해 굴소스를 약간 넣었다. 양파와 양배추, 돼지고기를 넣은 단출한 조리지만, 이 조합이야말로 자장면의 핵심을 이루는 골격이었다. 무엇보다 춘장과 양파는 빠질 수 없는 존재감이다. 자장면에서 이 두 재료가 빠지면, 마치 앙꼬 없는 찜방처럼 허전하다 못해 음식의 이름조차 잃어버릴 수 있다.
면은 마트에서 구한 자장면용 면을 사용했다. 갓 삶아낸 면발의 탄력은 배달 자장면의 퍼진 면과는 비교할 수 없다. 어쩌면 중화요릿집의 자장면도 이 레시피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다만 면발의 힘은 무시 못 한다. 식당에서 직접 뽑아낸 면의 탄력과 식감이 자장면 맛의 절반은 책임지기 때문이다.
음식에도 첫인상이 있다. 사람이 첫인상으로 기억되듯, 음식도 첫맛이 오래 남는다. 내가 처음 자장면을 먹었던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누구와 함께였는지, 어떤 자리였는지, 그 모든 것이 마치 어제처럼 떠오른다.
중화요릿집 홀을 지나 복도 우측으로 내실이 있다. 내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방바닥 위에 놓인 네댓 개의 식탁. 요즘처럼 시멘트 벽이나 정형화된 인테리어가 아닌, 마치 작은 방 안에 들어선 듯한 공간이었다. 벽지에는 약간의 주름과 오래된 때가 눌어붙어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었고, 햇살이 기웃거리던 창문엔 하얀 레이스 커튼이 살랑거렸다. 음식 냄새와 웃음소리가 뒤섞인 실내엔 사람 사는 집 같은 따스한 공기가 흘렀다. 서울의 한 동네 골목 안이었지만, 그곳은 도시보다 오히려 시골에 가까운 풍경과 정서를 간직하고 있었다.
오늘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자장면 한 그릇으로 가족의 저녁 밥상을 차려 해결했다. 아니, ‘해결했다’보다는 ‘즐겼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한 끼를 ‘해결했다’는 표현은 어쩐지 의무처럼 들리고, ‘즐겼다’는 말은 음식의 맛과 존재감을 한층 높여준다.
식사 준비는 어쩌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특히 저녁준비가 그러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 자장면이 떠올랐고, 주방으로 향한 나의 발걸음은 결국 가족의 미소로 이어졌다. 오늘 식탁 위에 올라온 자장면은 배달 자장면의 퍼진 면발보다, 갓 삶아 찬물에 헹군 면을 그릇에 담아낸 오늘의 자장면이 훨씬 맛있고 만족스러웠다.
오늘 주방에서 또 하나의 음식이, 결국 남편인 내 손끝의 진통 끝에 태어났다. 그것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한 끼가 아니라, 손에서 시작되어 마음으로 완성된 요리였다. 그 안에는 내 오래된 기억과 오늘의 하루가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