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빛과 물드는 색 사이에서, 만추의 숨결을 따라 걷다
낙엽과의 이별의 시간이 점점 가까워진다. 올해의 단풍은 유난히 곱다. 가을의 감성을 빌려 감정에 취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마음 깊은 곳에서 올해의 가을이 참 따뜻하고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오늘도 낙엽이 쌓인 길을 아내와 함께 산책로를 걸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이 발끝에 닿을 때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했다. 올해처럼 단풍이 고운 해는 처음 느끼는 기분이다. 하지만 아내는 올해 단풍이 유난히 예쁘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감성의 눈으로 본 풍경이든, 이성의 눈으로 본 자연이든, 올해의 가을은 확실히 특별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 아름다움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무더운 여름에도 우리는 거의 매일 한 시간 반 이상을 숲길에서 걸었다. 그리고 가을의 시작과 끝을 잇는 지금까지도 그 숲길을 걷고 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햇살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와 숲길을 환하게 비췄다. 며칠 동안 이어진 비와 흐린 날씨 탓에, 오늘의 햇살은 더욱 따뜻하고 고마웠다.
습한 날이 계속된 탓일까. 숲 속에는 버섯이 유난히 많이 돋아 있었다. 버섯을 보는 순간, ‘자연산’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끌려 조금이라도 따서 식탁에 올려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독버섯 주의’라는 검색창의 경고 문구를 보는 순간, 그 생각은 이내 접었다.
숲길 옆에는 이미 다 자라나 빛을 잃고 시들어버린 고사리들이 눈에 띄었다. 한때 푸르렀을 그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갈색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여름 내내 찾아도 보이지 않던 고사리들이, 이제 와서 길가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름에 고사리를 봤다면, 지금 이 모습은 볼 수 없었겠죠?” 아내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모든 것은 때가 되어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식물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계절을 견디며 살아가는 자연의 지혜와 위장전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떨어진 낙엽의 색을 닮은 작은 버섯 두 송이가 숨어 피어나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여린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여름에 피어났을 고사리를 닮아 있었다.
생명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저마다의 이유로 이 계절을 살아내고 있었다.
우주복을 쏙 입은 아이가 자기만 한 강아지를 데리고 터벅터벅 걷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 귀여운 풍경이 눈앞에 오래 머물렀다. 순간, 이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함께 산책을 나온 할아버지께 사진 촬영 허락을 구했더니,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덕분에 가을 산책길에서 만난 특별하고 따뜻한 추억 한 장을 카메라에도, 그리고 마음에도 고이 담을 수 있었다.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니 호수 공원에 들어섰다.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운 채, 호수 속 물고기가 걸리기를 인내의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평일이라 주말만큼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낚시에 몰두한 채 흐트러짐이 없었다.
호수 위로는 모처럼 햇살이 반짝이며, 잔잔한 물결이 부드럽고 포근한 오후의 시간을 감싸 안고 있었다. 낚시하기에도, 가을 햇살을 느끼기에도 그만인 날씨였다. 호수를 두 바퀴 돌고 나서, 숲을 빠져나와 근처 맥도널드에 들렀다. 커피 두 잔을 시켜 놓고 아내와 마주 앉았다. 점심시간이 지난 매장은 마치 폭탄을 맞은 듯 식탁이 정리되지 않은 채 어수선했다. 직원은 분주히 테이블을 치우고 있었지만, 매장 안은 묘하게 고요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몸을 데워주자 마음에도 한층 여유가 스며들었다. 커피를 마시고 다시 일어서 집으로 향하는 길, 캐나다 대형마트 중 하나인 ‘슈퍼스토어’에 잠시 들렀다.
중앙통로에는 큰 박스가 여러 개 놓여있다. 한쪽 박스에는 한국 새우깡이 가득 쌓여 있었다. 1인당 네 봉지만 구매할 수 있는 한정 판매였다. 가격은 99센트, 우리 돈으로 천 원 남짓. 어릴 적에도 천 원쯤 주고 사 먹었던지 않았을까 가물 거리는 가격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부담 없던 가격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아내는 새우깡 두 봉지를 집어 들었다.
어린 시절에도 새우깡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새우깡은 이제 노년기에 접어든 과자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 맛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무한한 생명력을 지닌 듯했다.
이런 소소한 주전부리에도 추억이 스며 있다.커피 향처럼 은은하게 번져오는 그 따뜻함이, 하루의 온기를 옛 기억 속으로 천천히 데려가고 있었다.
마트에서 과일과 새우깡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늘 그렇듯 저녁 산책길은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오늘도 저녁에 산책하던 그 익숙한 길로 접어들었는데, 어느 집 창가에 앉아 있는 강아지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산책할 때마다 늘 마주치던 그 강아지였다. 강아지는 언제나 주인이 없는 시간, 소파 위에 올라서서 바깥을 내다보곤 했다.
언제부턴가 그 창가에는 강아지의 모습이 한동안 보이지 않아 궁금했었다. 그런데 오늘, 오랜만에 강아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특별한 교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이였을 뿐인데 왠지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아내와 함께 창문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반가움의 인사를 건넸지만, 강아지는 이유를 알지 못한 듯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집 근처에 이르자, 낙엽을 쓸어 모으는 송풍기(Leaf Blower)의 요란한 소리가 귀를 찔렀다. 두 사람이 어깨에 블로워(Leaf Blower)를 메고 길가의 낙엽들을 이리저리 몰아넣고 있었다. 낙엽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이 시끄러운 소리를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시끄럽기는 하지만, 이 소리가 멈출 때쯤이면 가을도 함께 떠나가겠지 하는 아쉬움이 스쳤다.
오늘도 산책길에서 낙엽을 보며 색깔과의 전쟁 같은 하루를 보냈다. 붉은빛, 주황빛, 노란빛이 뒤섞인 세상 속을 걷는다는 건,
결국 지나가는 아름다움을 잠시라도 붙잡아보려는 마음의 몸짓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의 산책길은 더 강렬했고, 더 오래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