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의 휴일, 밴쿠버 경기장에서 드러난 두 응원의 선택
비 내리는 토요일 주말 오후, 밴쿠버에서는 조금 특별한 풍경이 펼쳐졌다. MLS컵 플레이오프 준결승 LAFC와 밴쿠버 와이트캡스의 중요한 경기가 열린 날이었다. 경기 며칠 전부터 교민사회는 유난히 들썩였고, 이례적일 정도로 많은 한인들이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손흥민 선수를 보기 위해서다.
밴쿠버의 연고팀인 와이트캡스보다 “한국 선수 손흥민이 뛰는 경기”를 직접 보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던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나 역시 밴쿠버에 사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LAFC는 미국 팀이고, 와이트캡스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연고팀이다. 만약 손흥민 선수가 LAFC 소속이 아니었다면, 교민 대부분은 당연히 와이트캡스를 응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한국 스타를 눈앞에서 보고 싶다”는 감정이 지역팀에 대한 응원을 잠시 넘어선 것이다.
나는 직접 경기장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유튜브로 경기를 봤지만, 아들, 아들 친구, 지인들은 며칠 전부터 계획을 세워 BC 플레이스를 찾았다. 이번 경기만큼은 직접 ‘손흥민’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손흥민이 출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인사회 커뮤니티는 물론 한국에서도 이와 관련된 기사가 연이어 쏟아졌다. 경기장에는 5만 4천 명이 넘는 관중이 몰렸고, 플레이오프다운 열기가 경기장 전체를 뒤덮었다.
지난달 아내와 아들과 함께 와이트캡스 경기를 보러 갔을 때만 해도 상대팀은 한국과 관련 없는 팀이었다. 그땐 고민 없이 연고지 팀을 응원하며 즐겁게 경기를 봤다. 그때도 중앙석 가격이 한 명당 10만 원이 넘었는데, 이번 준결승은 그보다 훨씬 비싸고 예매조차 어려웠다. 심지어 거래가로는 상상하기 힘든 가격까지 나왔다고 한다.
나는 축구를 볼 때마다 늘 90분 동안 펼쳐지는 경기가 삶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어제 경기는 거기에 연장전과 승부차기까지 더해지며 한 편의 영화 같은 드라마가 되었다.
전반전은 밴쿠버 와이트캡스가 먼저 2골을 넣으며 앞서갔다. 후반 들어 손흥민 선수가 2골을 넣으며 극적으로 동점을 만들었고, 결국 경기는 승부차기로 향했다.
결과는 와이트캡스의 승리.
LAFC는 4강 진출에 실패했다.
경기가 끝난 뒤, 내 안에는 두 감정이 동시에 남았다. 하나는 손흥민 선수가 속한 팀이 패했다는 아쉬움, 다른 하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팀이 승리했다는 기쁨이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은 밤.”
손흥민 팀의 패배는 아쉬웠지만, 그나마 밴쿠버라는 도시팀이 선물한 승리가 작은 위안이 되었다.
한국 팬들은 손흥민 팀의 패배를 아쉽게 여겼겠지만, 밴쿠버 교민들은 조금 다른 감정을 경험한다. 외국에서 사는 이들에게 손흥민 같은 선수는 단순한 ‘국가대표’가 아니다. 고국에 대한 향수, 그리움, 정체성까지 담겨 있는 존재다.
그렇다고 지역팀에 대한 애착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 도시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지역팀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 역시 진해진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이번 경기에서는 한국인 선수 응원이라는 감정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예전에 이영표 선수가 밴쿠버 와이트캡스에서 뛰던 시절엔 이런 고민이 없었다. 그땐 한국 선수이면서 동시에 지역 선수였기 때문에 응원하면서 마음이 변심하거나 갈라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경기는 달랐다.
한국인 팬으로서의 마음과 밴쿠버 거주자로서의 마음이 정면으로 부딪힌 순간이었다.
결국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의 경계를 넘어섰다. 교민들의 모임이자, 타지에서 살아가는 한 한국인의 이야기이며,
“나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경험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밴쿠버에서 잊지 못할 밤이었다. 손흥민 선수를 응원하러 모인 교민들의 뜨거운 열기, 그리고 지역팀 와이트캡스의 승리가 한 경기 안에서 공존했던 이 풍경을 나는 오래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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