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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의 손길이 닿은 캐나다 숲에서의 따뜻한 오늘

팬데믹의 시간은 지났지만, 익숙한 일상에 변치 않고 남겨진 익명 흔적

by 김종섭

​일주일 내내 내리던 비가 잠시 멈추었다. 흐린 하늘이었지만 빗줄기가 멈췄다는 사실만으로도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비가 다시 내리기 전에 가까운 공원을 서둘러 걸었다.


산책길, 오래전에 쓰러져 이제는 밑동만 남은 고목의 속살 사이에서 축축한 낙엽 틈에 반쯤 가리어진 작은 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낙엽을 걷어내니, 돌 위에는 알록달록한 나비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문득 팬데믹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산책길 나무 위에 올려져 있거나 공원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익명의 위로가 담긴 그림을 그린 돌을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순간이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풍경이라 왠지 반갑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악몽 같았던 그 시절이 동시에 생각났다.

오늘 발견한 이런 그림이 그려진 돌들은 아마도 '친절한 돌 프로젝트(The Kindness Rocks Project)'의 일환이거나 비슷한 취지의 개인적 나눔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돌을 우연히 발견한 사람에게 작은 위로와 기쁨을 전하려는 작은 마음이 그 성격이다. 팬데믹 시기에는 사람들끼리 눈을 맞추기조차 어려웠고, 마주치면 최대한 멀리 떨어져 피해 갔다. 그때 돌 하나에 담긴 그림이나 메시지는 사람들의 마음에 조용히 스며들어 익명의 위로가 되었었다.


우리는 언제 그런 시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 시절을 대부분 잊고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망각의 동물이기에 지금은 마스크 없이 환한 얼굴들로 세상을 되찾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비 그림이 그려진 돌을 보는 순간, 마치 소풍에서 보물 찾기를 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기뻤다. 그때는 보물을 찾겠다며 산을 휘젓고 다녔지만, 오늘은 기대하지 않았던 보물찾기 선물이 눈앞에 불쑥 나타난 것처럼 느껴졌다. 팬데믹이 끝난 지 오래지만, 그 시절 우리가 서로에게 절실하게 건네려 했던 친절은 지금 우리 곁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얼마 전에는 대형마트에서 푸드뱅크 기부 행사를 보았다. 장을 본 뒤 식재료 몇 가지를 기부함에 넣고 가는 사람들, 곳곳에서 묵묵히 서서 봉사하는 사람들, 그리고 곧 거리에서 다시 만나게 될 자선냄비까지. 이런 풍경은 팬데믹이 끝났다고 해서 사라지진 것들이 아니다. 변함없이 꾸준히 이어지는 익명 연대의 모습이었다.

나비가 그려진 돌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쩌면 누군가 그냥 재미 삼아 남긴 작은 그림일지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나처럼 산책로에서 발견한 그 순간이 그 하루를 버티게 하는 조용한 응원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의미를 만드는 것은 돌의 크기나 그림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무언가를 통해 의미를 찾는 것보다, 우리의 생각으로 그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더 큰 힘이 될 수도 있다.

어릴 적 보물 찾기의 기쁨이 되살아났던 그 감정!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림이 그려진 돌을 발견한 단순한 생각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일상 속 기적은 특별한 사건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이렇게 산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한, 누군가가 조용히 건넨 그림이 담긴 작은 친절이 하루의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바꿔놓는 기적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나비 그림을 남긴 익명의 누군가는 “거창한 행동이 아니어도 누군가의 하루는 충분히 따뜻해질 수 있다”라는 믿음으로 그림을 그린 돌을 산책길에 내려놓고 갔을 것이다. 그 믿음이 지금 우리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산책길이 끝나갈 무렵, 시선은 또 다른 죽은 나무의 밑동에 닿았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초록 이끼가 무성히 덮인 그곳, 마치 작은 자연의 왕좌처럼 보이는 그 밑동 위에 도토리 두 개가 눈에 잘 띄게 올려져 있었다. 나란히 놓인 그 모습은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정성껏 배치한 듯 보였다.

이것은 산속의 주인인 다람쥐나 다른 작은 동물들을 위한 작지만 소중한 먹잇감은 아니었을까? 인간이 만든 그림돌(친절의 돌)이 사람에게 위로를 건넸듯, 이 익명의 방문객은 자연의 생명들에게도 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장난이나 우연일지 몰라도, 이 도토리 두 개는 숲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따뜻한 연대감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산책길에는 늘 숲과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책길을 걸을 때마다 이런 작은 마음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그리고 자연 속에도 함께 공존해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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