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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섭 Sep 06. 2024

한국에서 취업에 성공했습니다.

취업 후 다시 2달 만에 백수가 되었다

3번의 면접을 보고 취업에 성공을 했다. 물론 지인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가능할 수 없는 취업의 벽은 완고했다. 일단 한국에서 특별한 주거지가 없다. 일단 방부터 구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과제로 부상했다. 갑자기 몸과 마음이 바빠졌다. 무방비 상태에서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아내와 방을 구하기 위해 서둘러 출근할 회사가 있는 도시로 떠났다. 아내는 아들 결혼식을 끝내고 잠시 한국에서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3일 후이면 아내는 다시 캐나다로 출국을 하게 된다. 한국에 있는 기간에 남편의 방이라도 같이 구해주고 출국할 수 있다행스러운 일이.


직장은 포천인근 지역에 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포천지역 외곽으로 회사 대리점이 있었다. 가끔 업무순회차 오갔던 곳이기에 생소한 도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정한 도로를 통해 통행했기 때문에 대충의 도시 무늬스케치될 뿐 도심자체는  생소함으로 남아 있다.


회사는 도심에서 벗어난 외곽지역 자리 잡고 다. 주거할 방은 아무래도 도심이 좋을 듯하다. 일단, 도심과 회사 분위기를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어 장기 임대보다는 한 달가량 보증금 없이 살 수 있는 방을 구하기로 했다. 인터넷을 통해 여러 경로를 이용했다. 물론, 전에 주변 시세와 교통환경을 파악하고 갔다. 사전에 검색했던 방을 찾아갔다. 방은 사진에서 봤던 것과는 달리 구조부터 환경까지 많은 차이가 있었다.

또다시 발품을 팔기로 했다. 주변에 7층건물 4층에 방이 하나가 나와 있었다. 위치와 건물층수도 적당했다. 월세가 45만  지방의 도시 가격으로는 그냥저냥 적당한 가격대라 판단되었다. 창문이 탁 트여 비교적 안정감도 있고, 방도 비교적 넓고 쾌적했다. 주변에는 상가와 세무서, 농협마트. 다이소등 편의시설이 제법 잘 갖추어져 있고 출근할 회사까지 가기 위한 버스정류장도 걸어서 10분 내외 거리에 있었다. 주인에게 한 달을 살아보고 괜찮으면 오래 살지도 모른다고 상황을 설명 5만 원의 방값을 깎고 1달 임대료 40만 원을 지불하였다. 


이사라 할 것도 없다. 캐나다에서 가져온 캐리어 두 개와 그동안 덮었던 이불 베개이삿짐의 전부이다.


당일 방을 구할 것이라 생각하고 침구류와 개인짐을 모두 챙겨 왔다. 2일 후에 이사하는 조건으로 약식 계약서를 작성하고 가져온 이사 올 짐을 빈 방에 옮겨 놓고 다시 판교 아들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캐나다로 출국하고 곧바로 포천으로 떠났다. 월요일부터 출근이라 며칠간 시간의 여유가 있다. 나머지 시간을 낯선 도시 적응 기간으로 보내기로 했다. 시내 대부분 국적불명의 외국인들로 붐벼났다. 마치 동남아 여행을 온 기분이다. 터번을 쓴 인도인도 상당수 있었다. 한국에서 만큼은 인도인을 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않았다. 여지없이 한국에도 많은 인도인 근로자들이 생산현장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 가던 인도인이 없는 곳이 없다. 밴쿠버에도 인도에  느낌을 착각할 정도로 많은 인도인이 살고 있다. 외국인들 때문일까, 포천의 도시는 한국의 정취를 느끼기엔 뭐가 부족함이 있어 보였다.


월요일 드디어 사무실로 첫 출근을 했다. 집 근처에버스를 이용했다. 많은 외국인 근로자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까지 25분 정도 소요되었다. 회사는 스텐인레스판과 배관류를 유통판매하는 업체이다. 이밖에도 제조업체와 지금의 유통업체와 비슷한 유형의 사업장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 건실한 기업이다. 업무는 재고관리와 판매관리. 상품매입 이다. 처음 출근한 아침 시간대는 정신없이 직원들의 움직임이 빨랐다. 컴퓨터에는 입출고 상품 판매 현황이 모티터 화면은 쉴 틈 없이  바뀌어 나가고 있었다. 대부분 책상에는 ERP시스템이 연결되어 있었다. 낯설지 않은 시스템이다. 20년 전 한국전력공사에서 자체 ERP시스템이 개발되었을 때 운영에 관한 업무를 다루어 본 경험도 있고, KT에서 미국 오라클 시스템을 가져와 사용할 때도 업무적으로 사용해 본 경험이 있기에 어쩌면 ERP 시스템은 생소하지 아니한 원조격인 셈이다.


회장님과 사모님이 격려차 출근길에 사무실에 들렀다. 직원들과의 간단한 소개를 끝내두 분은 다른 사업장으로 복귀하였다. 회장님과의 관계는 캠프에서 만났다. 가끔 선거캠프 상황실에 들려 대화도 나누고 했던 후원자 자격의 기업인이다. 


회장님이 떠나시고 사업장을 둘러보았다. 간단할 것 같았던 물품 가짓수가 간단하지 않았다. 이 모든 물품을 재고 관리부터 상품구매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갑자기 부담감으로 바뀌어 갔다. 잘 적응해 갈 수 있을까, 일종에 두려움이 생겨났다. 첫날에 출근 표정은 사실 밝지 않았다. 한꺼번에 많은 업무를 소화해야 한다는 무리수가 따랐기 때문이다. 첫날의 마음은 2~3일 출근하면서 지켜보고 최종적으로 회사에 다닐 것인지를 고민해 보기로 했다.


출근할 때마다 또 다른 문제점이 하나하나 돌출되어 가기 시작했다. 처음 업무를 설명할 때의 업무영역이 생각보다 지나치게 많았다. 3일이 지났다. 이후에도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하루하루 고민스럽게 시간을 보냈다. 갈등의 연속은 어느새 달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 달 전 얻어 놓았던 방은 계약기간이 종료시점이 되었다. 이번에는 한 달 거주 가능한 방이 없어 두 달 계약 조건이 가능한 방을 얻어 계약을 했다. 그냥 처음에 있던 방에 거주하려다가 2달도 채우지 못할 듯하여  부담 없는 찾다 보니 거주지를 이동하게 되었다.


어느 회사이든 적어도 3개월 정도는 회사 적응 기간을 위해 3 달이라는 수습기간을 가지고 간다. 나에게는 수습 기간이 특별히 정해진 내용이 없었다. 하지만 정확한 업무 파악을 위해 소요되는 일반적인 기간은 엄격히 따지고 보면 또한 예외아니었다.


회사달 동안의 업무 성과가 만족했던 것 같다. 출퇴근과 개인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승용차와 유지비를 부담해 주겠다는 조건이 제시되었다. 물론 회사는 조건이 있다. 장기간 근속 의사가 확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마음에 결정이 되면 즉시 내일이라도 차량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사실, 회사를 계속 다닐 자신이 없었다, 이유가 있던 가장 중요한 일이 입사 며칠 전 출되면서 많은 갈등의 시간을 보내왔다. 회사 최종 책임자로 있는 이사 직책을 가진 분이 있다. 그는 오십 대 초중반이었다. 사용주와는 가까운 인척이다. 그에게는 분노조절장애라는 것이 있어 새로 입사하는 직원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수시로 퇴사를 한다는 정보를 납품 거래처 운전기사를 통해 듣게 되었다. 납품기사분도 납품 도중 이사 와도 크게 다툰 적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이곳에서 오래도록 근무하려면 어떤 일이든 인내를 가져야 한다는 위로의 말까지 덧붙여해 주었다. 물론 아직까지 이사와의 관계는 별문제 없이 서로 잘 화합하고 있다. 어느 날 직원 중 넌지시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 김 선생님! 박 이사님이 생각이상으로 김 선생님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잘 대해 주시고 있어요"

느낌 있는 귀띔을 해주었다. 미리 상대에 대해 파악하고 경계심을 가지고 대처하라는 귀띔인 듯하다. 고마운 일이기는 지만, 왠지 선입견이 생겨나고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는 심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귀띔은 사직을 결정해야 한다는 단계까지 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새로 이사한 원룸이다

그 후 퇴사 시점만을 보고 있었다. 가끔  사내에서 분노 조절을 이겨내지 못하는 본성을 몇 번 목격도 하게 되면서 퇴사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언제 또 분노가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분위기에서 눈치 보고 가슴 쪼여가면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직장생활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적응하면서 충분히 내편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의 테크닉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매번 추가적으로 신경 써가면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지나친 감정 소모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이러한 단순한 이유에서 사표를 결심한 것만은 아니다. 또 다른 깊숙한 사연이 있다.

사내에 인인척이 또 있었다. 그 친구로 인해 친척 한분이 퇴사를 하고 또 한분은 인수인계를 끝내고 다른 사업장으로 옮기려는 서순을 밟고 있었다. 이밖에도 밝히기 좀 난해한 사건 사고가 그동안에 여러 차례 있었다. 그 일이 나에게도 찾아올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에 빠른 결정이 필요했다. 회장님을 위해서도 장기 근속할 것이 아니라면 일찍 회사를 그만두는 편이 좋을 듯하여 두 달 만에 최종 결정을 내고 사표를 제출했다.


역이인을 위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많다. 현지 캐나다에서 주거지를 정리하고 온 상태도 아니고, 한국에서 교통수단부터 거주지까지 걸림돌이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남편의 직장이 안정된다면 아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왠지 새로운 분야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에서 처음 얻은  첫 직장은 이렇게  불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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