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느끼는 감정은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입니다.
연초가 되면 회사에서는 연례행사가 이어집니다. 시무식 사장님의 경영 전략 발표를 시작으로 조직이 정비되고 승진 발표가 이어집니다. 승진 인사는 발표가 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을 씁쓸하게 만듭니다. 물론 승진한 사람들을 축하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들보다 승진에 누락된 대상자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1년마다 이렇게 아픈 사람들을 만들어야 하는 건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문제는 과연 공정한가에 있습니다. 물론 제가 판단할 영역은 아니겠지만 승진이 된 사람들 중에서 몇몇에 대해서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예전에 인사 담당을 했던 지인은 인사 평가에 대해서 피겨스케이팅 점수에 비유 했었는데요. 달리기나 수영 처럼 기록에 의해서 순위가 결정되는 게 아니다보니 심사위원의 주관이 개입될 수 밖에 없는 게 피겨스케이팅인데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자꾸 소치올림픽 때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김연아 선수가 안타깝게 은메달을 받은 그 사건 말이죠. 자꾸 공정성에 시비를 걸고 싶어지더군요.
분명 저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대상자도 아니었을 뿐더러 사실 승진에도 크게 관심이 없기도 했습니다. 어짜피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요. 하지만 주변의 안타까운 분들을 볼 때마다 승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승진인사보다 저를 우울하게 만든 것은 이동인사였습니다. 우리 회사는 일년에 두 번씩 직원들의 직무 이동이 있는데요. 일반 회사와 달리 이동이 잦은 편입니다. 스페셜리스트보다는 다양한 분야에서 골고루 일을 잘하는 제너럴리스트를 중히 여기는 인사 정책 때문인데요. 직원들도 이런 정책에 대해 싫어하지 않은 눈치입니다. 잘못된 업무에 배정받았을 때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이동 인사인데 이번 이동 결과를 보고 저는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저희 팀원의 이동이 있어 일이 많아졌기에 그런 마음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번 인사 이동을 보면서 회사에서 직원의 역량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구잡이로 이동을 시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저희가 있는 마케팅 본부의 이동은 처참했는데요. 부서 팀장 전체가 바뀌는 곳도 있었습니다. 저희 부서도 5명 팀장 중 3명이 교체됐습니다. 그간 어떤 일을 했는지와 관계 없이 장기판의 말을 바꾸듯이 쉽게 바꾸는 듯 한 느낌을 받으니 화도 났습니다. 우리 부서의 일을 누구나 와서 뚝딱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물론 저희 부서에서 하는 일이란 게 누구나 와도 쉽게 적응 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하지만 얼마나 깊은 고민을 했느냐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오래 일한 사람을 그저 고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상대적으로 우리 회사의 핵심부서라 불리는 인사, 재무, 전략의 이동은 달랐습니다. 그곳은 그래도 팀장, 팀원들의 전문성을 고려한 듯 했습니다. 이동도 소폭이었고 이동을 한다해도 그동안 유관부서 업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했거든요.
제가 왜 소외감을 느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속한 본부가 천대받고 있다는 게 안타까운 것도 있지만 그 속에 있는 저 또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습니다. 휴직을 하고 회사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인정받는 욕구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괜히 짜증이 났습니다. 그동안 휴직을 하면서 느꼈던 것들이 복직을 하고 석달만에 도루묵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멍하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얼마 전 독서모임을 통해 읽었던 "내면을 검색하라"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구글에 명상을 도입한 차드 멩 탄이 쓴 이 책은 명상을 통해 내면의 평화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이 책에서 감정을 하나의 경험이라고 생각하라고 한 말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감정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마음챙김 연습을 충분히 하면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를 목격하게 된다. 즉 감정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눈뜨는 것이다.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 p.145
저자는 감정을 경험으로 인식하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생리적 현상으로 간주하고 조종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는데요. 마치 운동 후 근육이 아픈 것처럼 일시적인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 순간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 또한 저의 본질이 아니라 지나가는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려 보았습니다.
"아 나는 내가 중심부에 가지 못해 서운했구나. 내가 소외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쉬웠구나"
지금 지나가는 제 감정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내 존재가 문제인 게 아니며, 이런 감정이 하나의 경험이라고 생각하니 지나가는 바람처럼 한 번 나를 움츠리게 만들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람이 잦아들면 다시 저 자신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고요.
덕분에 다음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조금 바빠지긴 했습니다. 시키는 일도 많았고 제출해야 할 자료도 많았습니다. 중간 중간 짜증나는 감정이 훅훅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크게 한 숨을 내쉬고 지나가게 내버려두니 조금 덜 힘든 것 같았습니다. 의연히 견딜 수 있었고요.
괜히 자책하지 말아야겠구나 싶더군요. 흔들리는 갈대처럼 오른쪽 왼쪽 흔들리곤 하지만 뿌리는 뽑히지 않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냥 흔들리는 것 자체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인정하니 편안합니다. 그렇게 흔들리며 지내보렵니다. 어쩌면 이게 바로 휴직을 하며 얻어낸 것들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