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이야기는 잠시 접어둘게요
몇 달 전부터 회사 직원들과 독서 모임을 하고 있다. 회사 안에서 답답증을 느끼는 몇 분과 좀 더 새로운 형태로 만나 "수다"를 떨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뻔한 회사 이야기, 질려 버린 상사의 뒷담화 말고, 기왕이면 주제가 있는 이야기면 좋을 것 같았고, 그 중심에 내가 좋아하는 책을 넣어보자고 했다. 물론 편안한 마음이었다. 회사에서 지친 몸과 마음이 수다로 힐링이 되었으면 그래서 회사 생활의 활력이 되었으면 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 독서 모임은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이서 시작했다. 회사 동료들과 저녁 먹는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오프라인으로 시작했다. 5인 이상 집합금지에도 저촉이 되지 않아 부담도 덜했다. 그러다 한 명이 더 참여해 주셔서 네 명이서 독서 모임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 네 번째 참여하신 분이 함께 하게 된 계기가 재밌다.
원씽으로 독서 모임을 할 때의 일이다. 아마 두 번째 독서 모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디에서 수다를 떨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한 분께서 회사 바로 옆 건물 샐러드 가게를 추천해주셨다. 등잔 밑이 어둡다며 그만하 장소가 없다고 하셨다. 우선 저녁 시간에는 회사 사람들이 거의 안온단다. (이거면 충분하다) 그리고 평일 점심 장사를 주로 하는 곳이라 저녁에 사람 자체가 거의 없다고 했다. 밥먹으며 부담없이 이야기 하면 좋겠거니 싶어서 그곳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책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익숙한 인물이 가게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공교롭게도 셋 다 모두 아는 사람이었다. 알고보니 퇴근 길에 먹을 빵을 사러 온 길이었다고 한다.(운전하고 가는 길에 드실 생각이었다고.) 사고 후다닥 집으로 가려 했는데 우리가 갑자기 부르는 바람에 얼떨결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평소 책 읽는 것을 즐겼던 터라 비록 원씽이 읽은 책은 아니었지만 책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좋아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그 분을 우리 독서 모임 멤버로 영입했다.
네 명이서 한 독서모임에서 지난 달에는 장류진 작가의 <달까지 가자>로 이야기를 나눴다. 재밌게 읽은 소설인데다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내가 책을 추천했다. 이번에는 회사 회의실에서 조용히 진행했다. (돈도 안들고 좋았다) 아무래도 그게 좀 더 코로나에 안전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침 옆 건물에 확진자가 나와 우리가 가려던 샐러드집이 문을 닫기도 했었다.
회사 안에서 회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 책으로 한바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책 속의 무난이들처럼 무난한 평가를 받는 우리였지만 그 속에서 여러 직장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신기한 건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지, 직장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회사 욕, 상사 뒷담화는 없었다.
독서 모임 중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마지막에 합류한 분께서 그녀의 고민을 용기 내어 털어 놓았다. 번아웃이 온 듯 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누구보다 잘 하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한계에 다다른 듯 했다. 일 복이 있는 사람들이 종종 회사에서 보이는데 그 분께서 그런 스타일이셨다. 항상 일을 몰고 다니는 스타일이었는데, 꾸역꾸역 잘 하고 계시는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아픈 것들을 감추고 있다가 탈이 난듯 했다. 어디가서 말도 못하시는 거 같았는데 우리 모임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눠 주셨다.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무엇보다 더 큰 것은 응원하고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주 친한 사이도 아니지만 책으로 연결된 사이라 그런지, 아니면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을 하고 휴직을 해서였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분께서 열심히 살아온 지난 날을 부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주변에 많지는 않아도 댓가 없이 응원하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들었다. 적어도 아무 이해관계 없이 응원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응원을 하는 내 마음에도 뭔가 작은 불씨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군가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이 나 스스로가 힘을 내게 만드는 것 같았다. 왜 그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응원하는 내 말 속에서 나도 스스로를 응원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심한 내적 갈등을 겪을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고, 상대방을 비난할 때도 있다. 시기심과 질투심에 휩싸일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엄청난 자괴감을 느낀다. 내가 이러려고 책을 읽으며 자기계발을 했나 회의감이 몰려온다. 스스로 위축도 된다. 남들 앞에서 괜히 훈계랍시고 말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라는 생각이랄까? 어떻게 해서든 정신승리를 하겠다며 회사가 원래 그런 곳이야라며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 자존감을 깎아 먹는 대신 월급을 받는 거니까, 라고 생각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 내가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자주 있었다.
그런데 이날 독서 모임을 하면서 책 이야기도 좋았는데 누군가를 온전히 응원하는 나를 보면서 뭔가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동안 내가 공부했던 것들이 헛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회사 밖과 회사 안 사이에 약한 회색지대가 생긴 것 같았다. 그 회색지대 덕분에 회사 안과 회사 밖의 괴리감이 조금씩 옅어질 것 같은 기대감도 들었다. 물론 여전히 회사 안에서 나의 태도에 대해서 나 스스로 불만족 스럽고 이래서 되나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 모임을 통해서는 조금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회사란 곳에서 겪는 내적갈등이 독서 모임을 통해서 조금은 완충이 되는 것 같아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휴직 전에는 회사에서 하는 동호회가 정치 모임이라 생각하며 거들떠 보지 않았는데 의외의 공간에서 나도 위로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독서모임이 끝나고 얼마 후 업무와 관련해 그녀와 사내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업무 이야기를 마치고 응원의 마음을 담아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짧게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독서 모임 이후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던 건 아니었지만 응원을 느낄 수 있어 힘이 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연히 합류하게 된 독서 모임에 대한 소감을 내게 전했다. 우연히 찾아오게 된 거 같아서 신기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좋다고 했다. 뭔가 우주의 기운이 그렇게 연결시켜준 것 같은 기분이어서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앞으로도 책을 중심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속에서 나도 그분께 그리고 그 분도 나에게 힘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될 수 있음 더할나위 없을 것 같다. 물론 코로나 때문에 당장 다음달 모임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상황이긴 하지만, 조만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날을 기대하며.